佛작가 파스칼 키냐르 ‘옛날에 대하여’ ‘심연들’ 동시 출간

입력 2011-01-14 17:24


‘옛날’을 잃고 표류하는 현대사회 되짚기

장편소설 ‘은밀한 생’(2001)이 번역 소개된 후 소리 없이 국내 마니아들을 확보해가고 있는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63)의 ‘옛날에 대하여’와 ‘심연들’(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두 책은 그가 “열 권이 될지 스무 권이 될지 모르지만 ‘마지막 왕국’ 속에서 나는 죽어가게 될 것”이라고 밝힌 ‘마지막 왕국’ 연작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 작품이다. 2002년 그에게 공쿠르 상의 영예를 안긴 연작의 첫 번째 작품 ‘떠도는 그림자들’에 이어 이들 작품 역시 뿌리 없이 표류하는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그는 ‘마지막 왕국’ 연작을 통해 ‘시간의 재구축’을 시도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의 개념(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일방향적 시간 개념)과는 아주 다른 형태로, 나는 시간의 재구축을 시도했습니다. 이러한 재구축은 물론 언어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인간의 언어는 모두 이분법적 대립 구조에 기대어 있습니다. 낮과 밤, 남자와 여자… 나는 기원(起源)의 자리에 ‘옛날’을 설정했습니다. 그로부터 모든 것이 유래하는 궁극의 지점이지요. ‘옛날’은 비단 인간의 기원에만 관련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이나 공간처럼, 시간 속에서 전진하는 모든 것들의 궁극에 존재하지요.”

키냐르가 번역자인 송의경씨와 나눈 대담에서 이렇게 설명했듯 그가 작심하고 ‘옛날’에 대한 정의를 시도한 담론이 ‘옛날에 대하여’다.

“우리는 어머니의 배 속에서 알몸이었다. 우리는 나체이기에 앞서 알몸이었다. 우리가 모방하다가 대체하는 목소리의 명령에 앞서 알몸이었다. 획득된 목소리에 불복하기에 앞서 알몸이었다. 그룸의 목소리가 내면의 목소리(수치심)로 되기에 앞서 알몸이었다. 죽음에 앞서 그리고 신의 땅 끝에 있는 서방을 향한 시간의 방랑에 앞서 알몸이었다”(‘옛날에 대하여’ 119쪽)

옛날은 사라지고 없는 무엇이다. 사라진 것을 부활시키는 유일한 수단은 언어뿐인데, 언어 이전의 세계를 출생 이후에 습득된 언어로 표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언어의 불충분성 때문에 무엇에 대한 기술(記述)은 자꾸만 미끄러진다.

키냐르에 따르면 시간은 두 가지만 존재한다. ‘옛날’과 옛날 이후인 ‘과거’.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정한 방향성을 지닌 시간 개념은 사회가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고안해낸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 키냐르의 생각이다. 그가 제시하는 진짜 시간이란 방향성이 없이 양끝만 있는, 흐르지 않고 제자리에서 돌며 수직으로 쌓여가는 그런 시간이다. 진짜 시간에는 미래는 물론 포함되지 않으며 현재마저도 과거의 일부로서 과거에 편입된다. “과거란 현재라는 눈(目)을 가진 거대한 육체(22쪽)”라는 것이다.

연작의 세 번째 작품인 ‘심연’ 역시 수많은, 정의할 수 없는, 한정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심연들에 대해 서술하지만 결국엔 ‘옛날’로 수렴된다. 그의 작품 세계는 옛날에 대한 미세 담론이 모여 이루어진 옛날에 대한 거대담론이다.

“생존, 그것은 눈물겨운 봄의 귀환이다. 다음 봄에 이르기. 귀환 못해 생기는 병이 최초의 병이다. 옛날 집을, 옛날 얼굴들을 보고 싶으나 귀환할 수 없어 괴로운 영혼, 고통, 오디세우스의 병도 이것이다. 불씨에서 멀어진, 여인네들의 품에서 멀어진 사냥꾼들의 병, 영웅들의 병.”(‘심연’ 51쪽)

키냐르는 작품 형식에서도 무정형적인, 무국적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그의 글은 소설인지, 철학 에세이인지, 혹은 시인지, 산문인지 알 수 없는 탈장르적인 독특한 형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키냐르에게 필연이고 순리이다. 그는 탄생과 함께 성과 이름이 등록되고, 소속이 정해지며, 국적과 국어를 획득하는 이 모든 사후적, 사회적 획득물을 찢는 것이야말로 문학가가 할 일이라고 말한다.

“태생 중에 태어나는 것이 사라지니 태어나자마자 초상(初喪)이다. 하루가 생기자마자 고인다. 하루가 발견되자마자 퇴색한다.”(‘심연들’ 52쪽)

키냐르 문학의 진가는 이처럼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하고, 탄생 전 죽은 것, 혹은 목 놓아 외치고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환기시켜준다는 데 있다. 그래서 파스칼 키냐르를 읽으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