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화련] 눈 내리는 풍경
입력 2011-01-13 18:52
내가 사는 포항에서는 눈을 보기 쉽지 않다. 영남지방에 눈 소식이 있다 해서 기대하면 슬쩍 비켜가고, 동해안에 눈이 온다고 해 기다리면 포항만 쏙 빼놓는다. 전국이 하얗게 눈꽃을 피울 때조차 이곳에는 눈 대신 비가 내리기 일쑤다. 드물게 정말 눈이 내리면 도시 전체가 들뜨는 분위기다. 눈 경험이 부족해 교통난이 일어날지언정 우선 반갑다.
그 귀한 눈이 포항에 푸지게 왔다. 올 겨울은 시작이 좀 달랐다. 기온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눈발이 날렸다. 때맞춰 밖에 있었거나 눈 밝은 사람이나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희미했지만 분명 눈이었다. 그 얇고 서늘한 것이 이마를 스치는 순간 어쩐지 함박눈의 예고 같았다.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새해를 축하라도 하듯 해맞이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눈이 희고 두꺼운 연하장처럼 도시를 덮었다. 아침에 신문을 가지러 나갔을 때만 해도 잠잠했는데, 집안일을 하다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밖을 보니 벌써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처음엔 싸락눈이었다. 속삭임 같았다. 싸르락싸르락, 나뭇가지와 마른 풀을 감싸는 소리가 들릴 듯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람이 자고 속삭임은 잦아들었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세상이 고요해졌다.
밀린 것을 다 풀어놓으려는 듯 눈은 날이 저물어도 그칠 줄 몰랐다. 창가에 서서 눈송이들이 어둠에 녹아드는 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밖이 환해졌다. 남편이 마당의 전등을 켰던 것이다.
어둠이 물러가고 눈꽃들이 다시 하얗게 살아났다. 살아서 흔들리는 꽃, 포근하고 부드러운 꽃송이, 겨울 밤 유리창 화면에 담기에 그만한 게 있으랴. 하염없이 바라보기에 그만한 풍경이 또 있으랴.
슬며시 자리를 떴던 남편이 마른 걸레를 가져와 창을 닦기 시작했다. 날씨가 차서 유리에 자꾸 김이 서렸다. 화면이 뿌옇게 흐려졌다. 흐린 화면을 밝히는 게 임무라도 되는 양 남편이 계속 창을 닦았다. 닦고 나서는 화면 옆으로 비켜섰다. 그 모습이 얼마나 낯설게 보이는지 자신은 모르는 것 같았다. 평소 걸레질은커녕 청소기도 돌릴 줄 모르는 사람, 눈 구경 좀 하랬더니 길 막힐 걱정만 늘어놓던 그였다.
해마다 겨울이면 나는 입버릇처럼 눈 타령을 했었다. 큰 눈에 강원도 고갯길이 막혔다는 소식이 들리면 공연히 설렜다. 나도 하루쯤 눈 덮인 산마을에 갇혔으면 싶었다. 그런 말을 입 밖에 냈다 남편의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때 산골 오두막 창가에 앉아 종일토록 눈 내리는 풍경이나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남편이 혹시 그 말을 떠올렸을까? 그렇다면 더욱 그답지 않은 일이다. 철없다 할 그런 소리를 마음에 담아 둘만큼 섬세하거나 자상한 남자가 아닌데….
포항에 쏟아진 이번 눈은 70년 만의 폭설이라고 한다. 눈폭탄이라는 말대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길이란 길은 다 막아 일상을 온통 흐트러뜨렸다. 수십년 굳건하던 남편의 무심함마저 흔들어 놓았다.
이화련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