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소는 누가 키우나”
입력 2011-01-13 18:52
요즘 ‘개그 콘서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너는 ‘두 분 토론’이다. ‘백분 토론’의 아류 같지만 기껏 남녀 2명이 나와 5분 정도 설전을 벌이는 포맷이다. 남자의 허례와 여자의 허영을 꼬집는 게 특징인데, 여기서 남자가 막판에 늘 외치는 소리가 “여자가 그렇게 할 거 다 하면, 소는 누가 키우나?”다. 소를 키우는 게 여자의 본업이라는 억지 주장이 웃음을 유발시킨다.
여기서 장년의 시청자들은 농우(農牛)의 추억을 더듬는다. 굳이 여자의 것은 아니로되, 목축은 집안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논농사에 필요한 노동을 제공하는 데다, 새끼를 낳아 큰 벌이를 안겨주니 요즘의 맞벌이 부부나 다름없다. 돼지나 염소, 닭도 주변에 얼쩡거렸지만 경제적 가치로 따져 소와 견줄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전 식구가 소 키우는 일에 매달릴 수밖에.
생명질서 反하는 사육환경
소에 대한 존중은 생명사랑이기도 했다. 새벽에 쇠죽을 끓이는 것을 시작으로 소에게 하루 세 끼 먹이는 게 농가의 일상이다. 여름에는 내에 끌고 가 샤워를 시키고, 수시로 빗자루로 등을 쓸어주며, 겨울에는 거적으로 방한복을 만들어 입혔다. 농한기에는 산과 들로 몰고 나가 풀을 뜯기고, 그 사이에 지들끼리 뿔을 맞대기도 한다.
이처럼 늘 사람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인축(人畜) 간에 어느 정도 믿음이 생긴다. 소의 커다란 눈망울을 마주치면 괜히 미안해질 때도 있다. 말뚝에 묶인 소가 회전하면서 무심코 내 발을 밟았다가 식구의 것인 줄 알고 얼른 굽을 쳐들던 경험이 생생하다. 여물을 주는 내 머리를 핥기도 했다. 소는 그렇게 우리 삶의 일부를 구성했고, 그 결정판이 영화 ‘워낭소리’였다.
지난 시절 소의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구제역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29일 처음 발생한 이후 150만 마리의 가축이 죽임을 당했다. 전체의 11.3%가 매장됐으니 재앙 수준이다. 축산업을 넘어 농촌의 기반을 흔드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문제의 원인을 한 축산업자의 부주의 혹은 정부의 방역 시스템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가령 동물을 단백질 공급원으로만 여기는 태도는 불손하다. 인공수정으로 얼른 새끼를 낳게 하고, 배합사료를 먹여 살만 뒤룩뒤룩 찌게 하는 것은 반생명적이다. 그래서 소에게 고유한 되새김질마저 잊게 하는 행위는 창조질서마저 거스르는 것이다. 이같은 사육환경탓에 면역력이 약해지면 사소한 바이러스에도 맥을 못 추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규모의 적정성도 돌아보아야 한다. 국민 14명당 소 1마리, 4명당 돼지 1마리, 5명당 닭 4마리…. 너무 많지 않은가.
소비자들은 애완동물이나 야생동물과 달리 가축의 환경에는 무관심하다. 요즘의 소비행태는 동물의 존재감마저 잊게 만든다. 예전에는 푸줏간에 걸려 있던 고깃덩이에서 살점을 떼어내 신문지에 둘둘 말아 건네는 과정에서 동물의 삶을 의식했다. 이에 비해 요즘 마트에서 만나는 고기는 한 송이 꽃과 같다. 정육 상태가 곱고 포장술이 발달해 무슨 캔디처럼 보인다. 동물의 사육이나 도축 과정은 아예 떠오르지 않는다.
인간-동물 관계에 근본 省察을
물론 생업을 말하면 조심스럽다. 농민들이 동물에게 이로운 조건을 몰라서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규모의 경제도 있고, 수입 쇠고기와의 가격경쟁력도 고려해야 한다. 소의 역할이 경운기와 트랙터로 인해 달라졌는데도 예전 소의 지위를 이야기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사육 환경은 아니다. 축산이 지속가능한 산업이 되기 위해서도 그렇다. 예전에는 가을을 두고 “소 발자국에 고인 물도 먹는 계절”이라고 했다. 사람이 동식물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전제돼야 하는데 지금 그런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