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중심문명 ‘유럽 통설’ 반박하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편집된 과학의 역사’
입력 2011-01-13 17:38
우리가 미처 몰랐던 편집된 과학의 역사/퍼트리샤 파라/21세기북스
“‘폐하 어디서 시작할까요?”
흰 토끼가 물었다. 앨리스는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엄숙한 목소리로 왕이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라. 그리고 멈춰라.”
고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인용하며 과학의 시작이 어디인가를 논하는 서두부터 심상치 않다. 과학은 어디서 시작할까. 우리가 과학사를 말할 때, ‘이것이 과학의 출발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가.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았을 때?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혹은 훨씬 이전 탈레스와 피타고라스가 활약했던 고대 그리스 문명부터?
이 책은 과학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 최초의 시대는 고대 그리스이며, 그리스의 지적 유산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르네상스가 낳은 천재들에 이르러 만개했다는 상식에 대해 펀치를 날린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퍼트리샤 파라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편집된 과학의 역사’에서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리며 역사에 묻힌 천재들을 드러내고, 산처럼 솟은 위대한 이름들에게선 신비를 걷어낸다. 과학을 사회적·문명사적 측면에서 바라보고 당대의 종교와 철학까지 반추하는 통찰력도 보여준다.
알려져 있는 최초의 우주론이라 할 만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우주를 하늘과 지상이라는 두 개의 영역으로 보고 하늘은 신비로운 천상의 물질로, 땅은 타락과 죽음의 속성으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우주론이 깨진 건 고대 바빌로니아의 과학을 접할 수 있었던 헬레니즘 시대 학자들 덕택이었는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그의 생각은 어쨌거나 천 년 넘게 잔존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과학이라면 한 시간을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일주일을 7일로 환산할 수 있는 천문학을 자랑했던 고대 그리스 이전 바빌로니아인들의 학문은 과학이 아니라는 말일까. ‘최초의 과학’이라는 수식어는 어디에 붙여져야 할지에 대한 의문 제기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자. 서양 중심의 과학관, 더 나아가 세계관을 비판하면서도 사람들이 늘상 갖는 의문은 ‘그래도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류 문명에 기여한 건 유럽’이라는 관념이다.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200년 이상 앞선 금속활자라고 해도, 바이킹이나 중국인이 콜럼버스 훨씬 이전에 아메리카를 밟았다는 주장이 있긴 해도, 그것이 향후 역사에 무슨 영향을 끼쳤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미처 몰랐던…’은 중국과 이슬람의 과학을 조명해 과학사에 기여한 중심문명이 유럽이라는 통설도 반박한다. 고대 그리스의 유산을 물려받아 전파한 이슬람 세계의 기여와 나침반, 화약 등 250여 가지의 발명품이 제작된 중국의 진면목이 비춰진다. 20세기 중반 중국의 문명사를 재조명한 조지프 니덤의 연구가 무시된 이유는 한국 전쟁에서 미국이 생화학 무기를 사용했다는 중국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중국은 왜 선두 자리를 지키지 못했으며, 이슬람에서 과학은 13세기 이후 어째서 위축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현대과학을 다룬 장(章)에서는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분위기가 과학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흥미진진하게 묘사한다. 다윈의 진화론과 우생학이 사회에 미친 엄청난 영향, 불안정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던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 엄청난 업적을 이룩하고도 진정한 과학자로 인정받기 어려웠던 마리 퀴리와 리더퍼드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무지개에서 세 개의 색을 보던 시대에서 일곱 가지 색을 분류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진짜 진리가 어디 있었든지 간에 그것은 시시각각 변했다. 우생학자 프란시스 다윈은 “과학의 모든 공로는 처음 생각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그 생각을 납득시킨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좀 더 정확하게는, 후일 과학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해도 세상을 향해 납득시키기만 하면 그 공로를 가져갈 충분한 자격을 획득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영웅은 만들어지고, 때로 거짓을 진실이라 믿는 바람에 역사는 정말로 변하기도 한다는 걸 이 책은 보여준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