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수지 (15) 믿음이 맺어준 동반자 ‘고 김인수 박사’
입력 2011-01-13 18:00
여기서 다시, 남편 얘기를 하고자 한다. 나와 관련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남편 고 김인수 박사를 이야기한다. 2003년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이면서 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이었던 남편은 늘 든든한 후원자로, 자상한 반려자로 내 곁에서 힘이 돼 줬다.
남편과 나는 연애시절 6년 동안 240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서로를 향한 사랑이 뜨거웠다. 그러나 우리 부부 역시 여느 부부처럼 한때 이혼 위기까지 갈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시간도 보냈다.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1960년 대학생 영어성서 모임인 ‘죠이클럽’(현 죠이선교회)에서였다. 그곳에 갔던 첫날,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말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한 남자가 유창한 영어로 자기를 소개했다. 자신만만해 보이는 그는 기독교를 믿지는 않지만 영어를 배우기 위해 영어성서 모임에 가입했다면서 “기독교인들은 위선자”라는 말도 서슴없이 뱉었다. 그날부터 선교사와 친구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그를 놓고 열심히 기도했다.
“하나님, 김인수씨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해 12월 그가 갑자기 군대를 가게 됐다며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자신에 대한 얘기를 했다. 체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가정 형편상 1년 만에 자퇴하고 국제전신전화국에서 전신기사와 전화접수요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우리 클럽 회원들은 그가 워낙 영어를 잘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는 7남매를 둔 가난한 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먹는 것은 물론 교복도 해 입을 수 없어서 김천중학교 시절 남들은 동복을 입을 때 혼자 하복을 입고 다녔다고 말했다. 체신고등학교에 들어간 것도 학비가 면제일 뿐 아니라 생활비까지 줬기 때문이라고, 그것도 모자라 학기 때건 방학 때건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생들 학비와 생활비를 보태며 살아야 했노라고, 그때 말해 줬다. 나 역시 비슷한 가정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군대에 가는 그에게 시편이 있는 신약 성경책과 실과 바늘을 선물로 줬다. 이듬해 2월, 첫 휴가를 나온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성경을 줘서 고마웠다고 하면서 훈련을 받다가 쉬는 시간이면 성경을 읽었는데, 옛날에 자기가 알던 기독교와 다르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올해가 자신이 구원받는 해가 되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영어를 잘했던 그는 인천 송도에 있는 미군부대에서 행정직 일을 하게 됐다. 주말마다 휴가를 나오면 우리는 서울역에서 만나 광화문과 경복궁 앞을 지나 덕수궁, 법원 길을 거쳐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오는 ‘재건 데이트’를 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성경 말씀을 읽고 이야기했으며 매일 편지를 주고받았다. 부모님은 그의 편지가 배달될 때마다 철통같이 믿었던 딸이 ‘배반’을 했다며 노발대발하고 야단을 치셨다. 당시만 해도 고졸 학력에다 집도 가난한 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2남5녀 중 맏딸인 나에게 “너는 우리 집안의 맏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남자는 모두 도둑놈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 역시 자연스럽게 결혼하지 않고 동생들을 도우며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만난 후 나도 모르게 이런 다짐이 무너져 내렸고, 끝내 ‘김인수’라는 남자를 평생의 동반자로 맞이하게 됐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