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시크릿가든’의 길라임 액션대역 유미진… “이 길이 최선이었습니다 확실해요”
입력 2011-01-13 19:25
그 여자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그 여자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멋지다. 그녀는,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상투적이고 진부한 소개보다 곱절은 능력 있는 여자다. 그 여자는 꼭 체육관에서 만나야 한다. 시간낭비를 안 해도 되니까. 주먹 보면 성품 나오고, 발차기 보면 수준 보이고. 인생관이 노골적인지, 우회적인지. 슬플 때, 멜로드라마를 보는지 액션영화를 보는지. 답이 빠르니까. 그녀 같은 사람들, 등 뒤의 와이어처럼 존재의 꽤 많은 부분을 감추고 산다. 화면 안의 그녀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이다. 나중에 혹시 그게 그 여자인지 알게 되면 어머, 내가 그 사람 존재조차 모른 채 드라마를 논하는 경거망동을 했단 말이야, 뭐 그런 생각 들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 여자가.
“인어공주가 돼줄게 거품처럼 사라져줄게”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지난 10일 경기 파주시 탄현면 서울액션스쿨(대표 정두홍). 트레이닝복에 “시크한 커트머리”를 찰랑대는 스물둘 처녀가 갓 입대한 이등병 말투로 인사했다. ‘청춘’이 묻어나는 동그란 볼. 하지원 같은 여배우와 비교하는 무리수만 두지 않는다면 예쁜 얼굴이다. ‘시크릿가든’은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 분)과 재벌3세 김주원(현빈)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판타지 멜로드라마. 유미진씨는 주인공 길라임의 액션대역을 담당하고 있다.
유씨는 지난해 4월 서울액션스쿨 14기로 합류한 1년차 스턴트우먼이다. 수습 6개월을 빼면 현장경력 3개월. 애송이다. 한해 40명 안팎 액션스쿨 연습생 중 고된 훈련과 잦은 부상을 버텨내는 이는 고작 서너 명이다. 1년이 안 된 14기도 벌써 4분의 3이 나가떨어졌다. 여자만 따지면 상황은 더 한심해진다. 현재 국내 여성 스턴트 인력은 10명 정도. 만약 몇 년 뒤 ‘스턴트우먼 유미진’이 여전히 현역이라면 스턴트 종합선물세트 ‘시크릿가든’ 덕일 확률이 높다. 드라마에는 차량추격과 검술, 다치마와리(합을 맞춰 싸우는 연기), 와이어액션까지 죄다 등장한다. 그걸 다 맛볼 수 있는 ‘길라임’은 막 수습 뗀 유씨에게 대단한 기회였다.
“한창 훈련하고 있는데 정(두홍) 감독님이 ‘너, 키 몇이냐? 몸무게는?’ 묻더니 옆 선배한테 ‘쟤 훈련 많이 시켜. 검술이랑 와이어도 많이 태우고’ 그러시는 겁니다. 어느 날 불려간 곳이 ‘시크릿가든’ 촬영장이었습니다. 스턴트적인 게 많아서 단시간에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첫 촬영지는 서울 명동 한복판이었다. 핸드백 소매치기 일당을 자전거로 추격해 4대 1로 맞붙는 격투신이었다.
쇼핑객들로 바글대는 주말 명동거리. “액션!”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악당을 향해 자전거를 던지고, 몸을 숙여 주먹을 피하고, 오른손 왼손 주먹을 날리고, 오른 발을 차올려 ‘붕∼’ 공중을 날았다. 악당을 자동차에 패대기치고 멋지게 마무리 자세. “컷!” 무술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구경꾼들 사이에서 “우와∼” 감탄과 박수가 쏟아졌다. “그때는 말입니다. 아, 진짜, 내가 살아 있구나, 이 일을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 그랬습니다. 솔직히 선배님들이 잘 받아준 덕이긴 하지만.”
길바닥에서 몇 시간 촬영했지만 방영된 건 고작 20여초. 그나마 여주인공 하지원이 직접 한 액션과 이어 붙여 그녀의 연기는 몇 초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게 제일 중요했다. 이음새 감춘 수선마냥, 유미진의 스턴트는 화면에서 사라졌을 때 비로소 완벽해졌다.
“하나도 서운하지 않습니다. 많은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톱배우들 아닙니까. 저 사람의 아름다운 한 컷을 위해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습니다.”
“17년 운동만 한 소녀가 한 방울 한 방울 흘린 땀으로”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온다. 왠지 지금이어야만 할 것 같은, 이번이 아니면 평생 아닐 것 같은. 고교 졸업 후 모 전자회사에 입사했던 유씨는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체육대학에 입학했다. 어릴 적부터 “몸으로 배우는 건 뭐든 빨랐던” 운동권 소녀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대로 주저앉았다면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조용히 살게 됐을까. 지난해 초 인터넷에서 날짜가 지나버린 액션스쿨 모집공고를 본 날, 그녀는 ‘꼭 지금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일 출퇴근하고, 꼬박꼬박 월급 받고. 그건 내가 꿈꾸던 삶이 아니었습니다.” 무작정 짐을 싸들고 상경했다.
“액션스쿨에 가서 ‘뽑아주든, 안 뽑아주든 상관없으니 오디션만 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스턴트는 여자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배고프고 힘들다. 운동에 미치지 않고는 버티기 어렵다. 집에 돌아가서 견딜 자신 있는지 다시 생각해봐라.’ 답이 그거더군요. 그 말을 듣는데, 난 딱 확신이 서는 겁니다. ‘이 길이 내 길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남들이 다 말려도 내가 확신 있는 일을 해서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돈, 안정 같은 거 순간순간 행복하지 않으면 멀게 보면 불행한 일입니다.”
유씨는 다섯 살 때 합기도로 운동을 시작했다. 태권도, 검도, 유도까지는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무에타이 동양챔피언 출신인 관장님 덕에 격투기와 권투를 덤으로 배웠다. 지금은 합이 11단이다. 코치 눈에 띄어 초등학교 때는 2년간 남자아이들과 함께 축구선수로도 뛰었다.
어릴 적부터 부러지고 찢어지는 데는 이골이 났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합기도 시범을 하다 왼쪽 팔꿈치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왼손잡이였던 유씨는 그 후 오른손잡이가 됐다. 여고생 시절에는 격투기 시합 중 상대선수 팔꿈치에 맞아 코뼈가 주저앉았다. 발목이 나가고, 뼈에 금이 가는 일은 다반사. 지난주에는 텀블링 개인훈련을 하다가 어깨가 빠졌다. 딱 이틀 쉬었다. “그 정도야 다쳤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원래 그렇습니다. 같이 운동하는 친구가 인상 쓰면 ‘다쳤어?’ 묻습니다. 그러면 그 친구는 ‘아니, 인대 좀 늘어났어’ 아니면 ‘어깨 빠졌어’ 그래요. 늘 일어나는 일이니까.”
“어디서든 가슴 뛰는 일을 해 그럼 그게 꿈인 거야”
유씨는 “드라마를 전혀 안보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축구도 보는 것보다 뛰는 걸 좋아했고 영화는 청룽이나 리롄제 영화만 즐겼다. “제가 드라마 보면서 울고 그런 스타일이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드라마나 영화가 좋아 스턴트를 동경한 건 아니었다. 배우에 대한 꿈을 꾼 적도 없었다. 그녀를 밀고 온 건 온전히 운동이었다.
“운동에 미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운동하는 사람이 얼마나 멋진지 아십니까. 죽을 거 같은 순간까지 뛰다가 숨이 넘어갈 것 같을 때 딱 멈추고 가슴에 손을 올려놓습니다. 손바닥 밑에서 심장이 쿵, 쿵 뜁니다. 아, 내 심장이 뛰는구나, 내가 살아있구나, 이겨냈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지난 몇 개월, 유씨는 ‘운동하는 소녀’에서 ‘액션 배우’로 조금씩 성장해왔다. 그녀를 가장 많이 바꾼 건 현장이었다. 오감을 열고 선배들을 관찰하면, 몸은 머리보다 더 빨리 이해했다. 그렇게 알게 된 첫 번째 교훈은 ‘몸 대신 머리를 써라’였다. 좋은 액션은 머리에서 나왔다.
“카메라 앵글에 따라 액션이 달라집니다. 그걸 알게 됐습니다. 바스트숏(가슴을 중심으로 상반신을 잡는 앵글)일 때 혼자 바닥을 굴러봐야 카메라에는 안 잡히지 않습니까. 부감숏(위에서 아래로 찍는 앵글)일 때는 무대를 휘젓듯 넓게, 길게, 많이 움직여야 동작이 화려해집니다. 앵글 배우려고 요즘 드라마도 열심히 봅니다.”
조만간 유씨는 액션스쿨 내 카 스턴트 팀인 ‘F1’에 합류해 차량 스턴트를 익히게 된다. 여자로는 처음이다. 고난도 기술과 함께 고민하는 건 여성적인 액션이다. “여자 액션은 남자와 달라야 한다고, 우아한 액션을 고민하라고, 어느 여선배가 그러시더군요. 운동능력이나 기술에서 남자를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스턴트우먼도 배우니까 스타일이나 몸매도 예뻐야 합니다.” 비쩍 마른 여배우들 대역을 하자면, 아무래도 날씬한 게 유리했다. 유씨는 ‘시크릿가든’ 때문에 8㎏이나 감량했다.
유씨의 꿈은 길라임처럼 할리우드 진출이다. 그녀에게 전세기를 띄워 리안 잭슨 감독을 데려올 ‘재벌 남친’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스턴트우먼 유미진이 피터 잭슨과 리안 감독 앞에 서는 날이 오지 말란 법도 없다.
파주=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