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 영화와의 만남…첫 작품은 남양주촬영소

입력 2011-01-13 15:18


PIFF 15년의 기록 (2)

1988년 봄, 저는 영화계와 첫 인연을 맺게 됩니다.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1988년 4월 4일 문화공보부를 사직하고 영화진흥공사(이하 공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지금의 영화진흥위원회 전신이죠. 27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했고, 만 8년이란 ‘최장수 기획관리실장’ 기록도 남겼습니다.

장성 출신들의 뒤를 이은 ‘낙하산 인사’라는 영화계 일각의 반대도 있었지만, 어쩌겠습니까. 체면도 있고, 오기도 있는데….

부임하자마자 저는 원로영화인을 시작으로 감독, 배우, 기술직, 평론가, 언론인 등 각계각층의 영화인을 차례로 만났습니다. 영화인들의 경조사와 영화단체의 행사에는 경중과 원근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습니다. 공사 시사실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그것이 한국영화든 외국영화든 틈나는 대로 보았습니다. 공사를 방문하는 외국 영화인들은 빼놓지 않고 점심이나 저녁을 대접했고,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몇 푼 안 되었던 퇴직수당과 다달이 받는 봉급은 몽땅 밥집과 술집에 갖다 준 셈이죠. 그러면서 저는 점점 영화와, 영화인과 그리고 국내외 영화계와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영화계의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한 결과 저는 종합촬영소 건립이 영화계 최대의 숙원사업이며, 한국영화가 살 길은 해외진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즉시 ‘남양주종합촬영소’ 건립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의 정책결정 과정과 정부예산 획득 과정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장수 기획관리실장’ 시절의 인맥과 예산확보의 노하우, 그리고 당시 TK정권의 요직들을 움직일 수 있는 같은 TK출신이며 동갑내기인 배우 강신성일과의 의기투합으로, 그때그때 난관을 극복하고 종합촬영소 건립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부지매입에서 허가과정, 착공과 완공 후의 표적감사를 받기까지 종합촬영소에 얽힌 이야기는 한 권의 책에 수록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영화의 해외 진출은 ‘불모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제가 공사에 부임했을 때는 ‘88서울올림픽’(9·15∼10·2)을 5개월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올림픽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왜 놓치겠습니까. 미수교국인 공산권 국가를 중심으로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들을 초청해서 ‘우수외국영화시사회’를 개최했습니다.

9월 15일부터 2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소극장과 현대토아트홀(삼성동 현대백화점 내)을 빌려 개최된 시사회에선 소련,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유고를 포함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20개국, 28편의 영화가 상영됐습니다. 그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정복자 펠레’(덴마크), 1987년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주제’(소련), 198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우울한 시간’(서독) 등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공산권 영화가 처음으로 공식 소개된 행사였죠. 또 아주 작은 규모의 국제영화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해 7월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아다다’가 경쟁부문에 선정됐다는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한국영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던 임권택 감독을 설득했습니다. KBS에 양해를 구해 드라마 촬영 중이던 배우 신혜수도 교섭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몬트리올로 날아갔습니다.

박수길 주 캐나다 대사에게는 ‘한국의 밤’ 행사에 참석해 줄 것을, 문화공보부에는 천호선 주 캐나다 공보관을 몬트리올에 파견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현지의 라원찬 총영사는 대표단을 위해 만찬을 베풀고, 영사 1명과 승용차 1대를 업무용으로 내줬습니다. 아침 8시에 잡혀 있는 공식시사회에, 1400석의 메종네브 극장 좌석을 메우는 일이 난감했습니다. 저는 몬트리올 소재 한인교회 목사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교민들을 동원했습니다. 시사회 당일 객석은 만원이었고,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신혜수는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몬트리올에 있을 때, 우수외국영화시사회에 상영될 소련영화 ‘차이코프스키의 일생’의 필름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버마(미얀마) 주재 소련영화수출입공사가 새 필름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미수교국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죠. 시사회가 임박하면서 버마주재 소련영화수출입공사 아시아지사장 차라그라드스키가 필름을 갖고 한국에 왔습니다. 그와 몇 차례 만나면서 친해졌습니다. 그 결과 1989년 8월에 개최되는 모스크바영화제에 임권택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초청받게 됐습니다. 공산권 국가의 장벽을 뚫은 셈이죠.

차라그라드스키는 다음해 1월과 6월 다시 한국을 방문했고, 한국대표단의 모스크바영화제 참가는 물론,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와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지금의 알마티) 순회상영도 약속받았습니다. 제작사 대표인 이태원 사장, 임권택 감독, 주연배우 강수연, 풀 기자인 김양삼(경향), 이형기(한국), KBS의 정상일(PD), 김승연(카메라), 문화공보부의 강창석 사무관으로 대표단을 구성했고, 일본에서 합류한 스크린 잡지의 장명순 기자와 함께 도쿄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았습니다.

대표단은 7월 9일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당일 저녁 2400석의 러시아호텔 센트럴 페스티벌 홀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의 공식 상영에 참가했습니다. 이어서 공사가 주최한 ‘한국의 밤’ 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됐습니다. 파리에 머물고 있던 조선일보 윤호미 기자와 영화평론가 유지나가 모스크바에서 합류했고, 순회공연 중인 김매자 창무무용단원들이 모두 한복을 입고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성악가 루드밀라 남이 아리랑을 불러 파티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저는 영화제 마켓에 개설한 공사 부스에서 ‘헝가리필름’의 사장인 이스트반 자보 감독과 주딧 슈가 부사장을 만나 11월 중에 헝가리에서 ‘한국영화주간’을 갖기로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7월 18일, 폐회식에서 강수연은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몬트리올에 이은 두 번째 쾌거였습니다.

모스크바에 이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순방하면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상영했습니다. 그해 11월 20일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와 지방 도시에서 ‘한국영화주간’을 개최했고 배우 김지미와 윤일봉이 함께 갔습니다. 다음 해인 1990년 8월에는 강대선 한국영화협동조합 이사장, 정진우 감독, 배우 정윤희와 함께 한국영화 8편을 갖고 소련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을 또다시 순회했습니다.

저는 소련 연방 순회상영이 끝나자마자 모스크바에서 대표단과 작별하고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 창립을 위한 국제세미나에 참석한 후 바로 몬트리올로 달려갔습니다. 신승수 감독의 ‘수탉’이 경쟁부문에 올랐기 때문이었죠. 신승수 감독과 배우 김인문, 제작사 도동환 사장은 몬트리올에서 합류했습니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임권택 감독과 함께 새로 국교가 수립된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와 지방도시에서 한국영화주간 행사도 개최했습니다.

몬트리올과 모스크바영화제를 계기로 저는 많은 해외영화계 인사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한국영화 해외진출을 위한 단초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국제영화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습니다. 신혜수와 강수연의 여우주연상 수상 못지않게 한국영화의 거장, 임권택 감독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큰 수확이었습니다. 이때 친해진 임권택 감독과 배우 강수연은 안성기와 함께 훗날 부산국제영화제 창설과 발전에 든든한 지주 역할을 했습니다. 적극적인 해외활동을 통해 구축했던 해외영화계 네트워크 또한 부산국제영화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