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니의 정치… 15년 묵은 공약, 왜 자꾸 써먹나
입력 2011-01-13 18:06
“의료 혜택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노인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도록 틀니 건강보험 급여를 확대하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7년 8월 7일 서울 효창동 대한노인회 중앙회를 방문해 노인들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한나라당 경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후 대선 공약 중 하나로 틀니·보청기 의료보험 혜택을 꼽았다.
13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정부 100대 과제로 ‘틀니 의료보험 적용’을 선정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1996년 3월 총선을 앞두고 틀니 의료보험 적용을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 의료보험 혜택을 받아 틀니를 한 노인은 단 한 명도 없다.
15년 된 묵은 공약
이 정도면 노인들 화날 만도 하겠다. 대선 때마다 ‘틀니 공약’을 믿고 역대 대통령을 찍은 노인이 있다면 그는 15년간 ‘공약 배신’을 당한 셈이다.
“저는 여기 사무실에 출근한 지 3개월 됐어요. 다른 직원도 있긴 한데 직원들이 빨리 바뀌니까 틀니 보험과 관련해선 다들 잘 몰라요.”
대한노인회 서울연합회 관계자는 소속 단체가 2년 전 종묘공원에서 틀니 건강보험 적용을 위해 대규모 시위한 사실을 몰랐다. 대한노인회 중앙회 관계자는 “지역별로 틀니 의료보험 적용을 위해 활동하는지는 몰라도 중앙회에서 하는 건 없다”고 했다. 화도 날 만한데, 노인들은 집단적으로 분노하지 않았다.
노인단체들이 잠잠하다고 해서 틀니 문제가 절실하지 않은 건 아니다. 시민단체인 건강연대가 2008년 10월 성인남녀 7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의료관련 지출 중 가장 많은 부담이 되는 부분은 치과진료비(50.7%)로 조사됐다. 가장 많은 응답자(33.7%)가 건강보험을 가장 우선적으로 적용해야 할 항목으로 틀니를 꼽았다. 2006 국민구강건강실태조사에선 65세 이상 전체 노인 중 구강 문제 때문에 씹는 데 불편함을 느낀다는 비율은 53%에 달했다. 현재 치과 분야의 건강보험 보장률은 35.5% 수준에 불과하다.
노인들에겐 정치적 구심점이 없다. 종묘공원에서 진보·보수로 나뉘어 정치 시위도 한다지만 실질적인 삶의 문제, 복지 문제를 놓고 얘기할 장(場)이 없다. 몇 년에 한 번씩 틀니 문제를 놓고 대규모 시위를 한다 해도 일회성에 그칠 뿐이다. 정치인들이 10년 넘게 선거 때마다 ‘틀니 공약(空約)’을 우려먹을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힘이 빠져 가지고. 하하하….”
2년 전 ‘노인 틀니 건강보험 적용을 위한 공동대책회의’ 공동대표였던 서울 영등포노인복지관 서병수(65) 관장은 올해도 활동하느냐는 질문에 너털웃음부터 터뜨렸다. 틀니가 없는 노인들은 복지관에서 1시간씩 밥알을 씹고 또 씹어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다. 서 관장은 당시 이런 현실을 개탄했다. 그가 소속된 공동대책회의는 국회에 입법 청원서를 제출했다.
“주위를 봐도 임플란트든 틀니든 안 한 노인이 없어요. 당연히 돈 있으면 임플란트 하죠. 틀니도 못하는 노인, 정말 절박해요. 국에 밥 말아 우물우물 먹고, 반찬도 못 씹어서 겨우 김만 먹는데 식사가 돼요? 그럼 영양 부족에 걸리고 빨리 죽어요. 죽으면 끝나는 거죠, 뭐. 국회의원들 많이 쫓아다녔어요. 다들 말로는 필요하대요. 그래놓고 적극 나서는 사람은 없어요.”(서 관장)
“노인들에 대한 명백한 기만이죠. 의원들이 틀니 보험 적용해야 한다고 발의해 놓고 논의 안 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돈 없는 청원경찰도 로비하는데 자금력 있는 치과의사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복지부가 2012년 틀니 보험 적용하겠다고는 하는데 그것도 어떻게 될지 믿을 수 없죠. 그때는 대선 다가올 시기니까요.”
‘노인 틀니 건강보험 적용을 위한 공동대책회의’ 이태복 대표(전 보건복지부 장관) 얘기다. 그의 말마따나 17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 등 36명이 2005년 틀니 의료보험 적용을 담은 ‘국민건강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을 공동 발의했다.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18대 국회에서도 민주당 양승조 의원 등 95명이 비슷한 내용을 담은 8개의 법안을 제출했다. 민주당 김재윤 의원 등 22명은 비슷한 내용의 법안 두세 건을 중복 발의했다. 주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틀니 건강보험 적용을 담은 ‘국민건강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재차 발의했다. 이 수많은 법안은 현재 계류 중이다.
“17대 국회 때 의원들에게 전화도 꽤 했어요. 의지가 크게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진짜 의지가 있으면 재정을 어떻게 마련해야 한다든지 구체적인 데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까진 누구도 미치지 않았어요.”(구강보건정책연구회 김철신 회장)
2012년 틀니 약속은 지켜질까
“노인 의치·틀니에 대해 건강보험을 확대하자는 안이 1997년도부터 논의되고 있습니다. 조속하게 건강보험 지원이 확대돼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양승조 민주당 의원)
“그것은 동의하고요. 지금 2차 보장성 강화 계획에는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계획이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차곡차곡 진행이 되고 있기 때문에 틀니 보험 적용은 되는 것으로 생각하셔도 되지 않겠나 생각을 합니다.”(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지난해 8월 23일 복지부 장관 청문회 현장은 이랬다. 당시 진 후보자는 2012년부터 7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틀니 건강보험 적용을 목표로 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계획’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이 계획은 2009년 6월에 제정된 것이다.
그러나 두 달 뒤 상황은 달라졌다. 지난해 10월 복지부는 국정감사 주요업무 추진현황 자료를 통해 노인 틀니 보험 적용을 ‘검토’하겠다고 선회했다. 양 의원은 “진 장관이 ‘계획’에서 ‘검토’로 말을 바꿨다. 추진 의지가 없다”고 강력 비난했다.
진 장관은 같은 해 국정감사에서 “노인 틀니 보험 적용을 차질 없이 계획대로 진행하겠다”고 다시 입장을 바꿨다. 이번 정권에선 ‘틀니 공약’이 지켜질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치협 vs 건치… 치과의사들, 의견 달라
치과의사와 치과기공사도 ‘틀니 건강보험 적용’을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전국치과의사지부장 협의회는 지난해 11월 틀니 건강보험 적용 관련 건의서를 대한치과의사협회(치협)에 제출했다. 전국 16개 지부 1만여 치과 개원의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노인 틀니 보험 적용을 시행할 수는 있지만, 정부와 치과계의 충분한 협의 없는 졸속시행은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상복 치협 홍보이사는 “맞춤 제작 형식인 틀니는 복잡한 치료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쉽게 보험 적용하긴 어렵다. 사전 준비가 철저히 필요하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치협은 그러나 김희선 전 민주당 의원이 2003년 9월 ‘노인 의치 건강보험 적용’에 관한 국회 청원서를 제출할 때 보험 적용을 반대했었다.
비교적 젊은 치과의사들이 주축인 건강한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건치)는 보험 적용을 적극 환영한다. 건치 산하 연구소인 구강보건정책연구회 김철신(40) 회장은 “아무리 이익집단이라도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으면 의사로 존재할 가치가 없다. 치과의사의 1차 존재 이유는 국민 구강건강”이라고 했다.
“치과 진료에 관해선 우리나라 건강보험 보장성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가장 낮다고 볼 수 있어요. 수가가 높아서 보험 재정에 부담이 된다고 하는데 의사들이 관행적으로 받는 수가의 80∼90%만 받아도 적절하게 진료할 수 있습니다.”
‘갑’인 치과의사에게 틀니를 납품하는 ‘을’ 치과기공사 입장에선 건강보험 적용으로 인해 틀니 가격 덤핑이 가속화될까 조심스럽다는 입장이다.
“대형마트가 물건 싸게 판다고 마트가 손해 보는 거 아니잖아요. 납품업체가 손해 보는 거지. 치과기공사와 치과의사도 비슷한 거죠. 정부가 기공료는 기공사에게, 치료비는 의사에게 준다면 기공사들도 반대할 이유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치과의사가 틀니 보험 적용 때문에 이익이 예전보다 떨어진다면, 그걸 우리한테 전가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치과기공사가 저질 재료로 틀니를 만들 수 있고 결국 환자 손해로 이어질 수 있어요.” 대한치과기공사협회 손영석(54) 회장 얘기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0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총인구 4887만5000명 중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11%(535만7000명)를 차지한다. 65세 이상 노인이 겪는 가장 어려운 점은 ‘경제적 어려움’(44.6%)과 ‘건강 문제’(43.6%)인 것으로 조사됐다(2007년 통계청의 사회통계조사). 생활비를 자녀 또는 친척이 지원하는 비율도 42.1%에 달했다. 그러나 약 5년마다 수백만원을 들여 새로 맞춰야 하는 틀니는 여전히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정치권이 보편적 복지냐, 선택적 복지냐를 두고 서로 공격하는데 어르신들이 그런 데 관심 있나요? 선거 때마다 틀니 해 준다고 약속해 놓곤 신의를 버리고 있어요. 어느 당에 유리한가, 그런 데 관심 없어요, 국민은. 우리 사회 공공성이 회복되느냐, 삶의 질이 향상되느냐, 그게 핵심이죠.”(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이광재 사무처장)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