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정태] 部處 정체성 혼란
입력 2011-01-12 18:59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 정부조직개편이 이뤄졌을 때 각 부처들은 약칭을 짓는 데 골머리를 앓았다. 통폐합을 통해 탄생한 기획재정부, 지식경제부, 보건복지가족부가 특히 그랬다. 관행대로 하면 ‘기재부’ ‘지경부’ ‘보복부’로 불러야 하는데 어색했다. “뭘 기재해?” “이 지경이 됐나?” “보복한다고?” 등으로 놀림감이 될 수 있다. 골치깨나 아팠던 건 약칭에 부처의 정체성을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노동부가 고용노동부로 명패를 바꾸면서 약칭을 ‘고용부’로 정했을 때도 정체성 문제가 불거졌다. 정부가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를 꾀한 것이지만 노동계는 신성한 ‘노동’ 개념을 도외시했다며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표방한 대통령을 의식한 것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사실 부처들은 대통령의 ‘말씀’ 한마디에 정신 못 차린다. 대통령이 ‘친서민’을 강조했을 때도 각 부처는 경쟁하듯 서민 정책을 쏟아냈다. 올 들어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5% 성장, 3% 물가’를 제시하고 4일 국무회의에서 ‘물가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각 부처가 또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기관 정체성마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대표적인 게 공정거래위원회. 김동수 신임 공정거래위원장이 공정위가 물가기관임을 자임한 것은 생뚱맞다. 조직원 군기를 잡고 기어이 물가단속에 나섰다. 독점 및 불공정거래행위를 규제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촉진하는 게 본업임에도 안중에 없다. 점령군 같다. 인위적 가격통제는 부작용을 낳을 뿐인데도. 전직 공정위 관료가 “시장경제의 재앙”이라고 비판할 정도다.
한국은행은 정반대의 스탠스다. 한은의 존재 이유는 물가 안정이다. 그런데 지난해 4월 취임한 김중수 총재는 성장 위주에 초점을 맞춰왔다. 성장을 중시해 온 대통령 의중에 딱 맞는다. 올해 통화신용정책 운용 방향도 애매모호하다. ‘견조한 성장 유지’와 ‘물가 안정 기조’. 상충되는 조합이다. 금리 조정이 쉽지 않다.
오늘(13일)은 관계부처가 합동으로 물가안정 종합대책을,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금리 인상 여부를 발표한다. 같은 날로 잡힌 게 절묘하다. 고강도의 물가 대책을 내놓는데 웬 금리 인상? 성장은 신성불가침 영역이니 한은은 빠져라, 뭐 이런 무언의 메시지 아니겠는가. 이게 시장의 관측이다. 이 관측이 맞는다면 말이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곳은 아예 간판을 새로 다는 게 낫다. ‘공정물가관리위원회’ ‘한국성장은행’ 정도는 어떤가. 맘에 안 들면 작명소로 가든지….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