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정승훈] 일상에서의 애국심
입력 2011-01-12 18:56
지난 10일 밤, 꽤 많은 국민들은 잠들지 못하고 새벽 3시가 넘도록 TV 앞을 지켰다. 아시안컵 축구 한국과 바레인의 경기를 시청하기 위해서였다.
11일 아침엔 한파가 예고돼 있었고, 눈이 내린다는 예보까지 나온 상황이었다. 지각을 면하기 위해선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상당수 국민들은 기꺼이 2시간 이상의 단잠을 포기했다. 출근에 대한 부담을 감내하면서까지 축구 경기를 지켜본 까닭은 종목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감정적인 요인이 더 컸을 것이다. 일본팀 경기였다면 그 시간에 지켜보지는 않았을 테니까.
국민들은 일상을 다소간 희생하면서까지 국가대표팀 경기를 지켜보며 팀의 일원이 된 듯한 감정을 느낀다. 가끔은 감정에 북받쳐 눈물도 흘린다. 국내 기업이 괄목할 만한 성적을 냈을 때도 뿌듯해한다. 자신과 직접적 관련이 없어도 전쟁 참화를 겪은 불모의 땅에서 세계적인 기업을 일군 데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외국에 머물 때도 한국을 비하하는 얘기를 들으면 흥분하게 되고, 칭찬하는 얘기를 들으면 절로 어깨가 들썩거린다. 인지상정의 애국심인 셈이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 일상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왜 그럴까. 법과 제도 및 권력과 군사력을 갖춘 조직으로서의 대한민국, 평소에 우리가 생활에서 느끼는 시스템으로서의 대한민국에 대해 감동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평상시엔 국가에 대한 신뢰가 크지 않다는 얘기다.
지난해 11월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 도발했을 때를 돌이켜 봐도 명확하다. 전우가 희생되고 다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봤음에도 연평부대 병사들은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와중에 포를 돌려 반격했다. 그 모습을 전해들은 국민들은 애틋한 마음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병대원들이 국민에게 짠한 감동을 준 반면 국가는 국민에게 실망만 줬다. 국가 수뇌부는 북한의 포격 도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위기대응 시스템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제대로 감지해 내지 못했다. 포격 도발 이후에도 정부의 대북정책은 우왕좌왕했다. 국민들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고위 공직자가 내정될 때마다 병역을 제대로 마쳤는지를 따져봐야 하는 국가. 공직자와 선만 닿으면 손쉽게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사회.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해야 하는 자리에 납득하기 힘든 급여를 받은 사람을 지명해 놓고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다”는 얘기를 되풀이하며 국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정부. 이런 모습들을 보며 국가 시스템의 불합리를 각인하고 있는 국민들이 주변의 외국인들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을까. 자녀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변할 수 있을까.
지난해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의 설문 조사에서 74%에 이르는 국민들은 한국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다. 숱한 여론조사에서 고교·대학 재학생들의 절반 이상은 “기회가 되면 이민을 가겠다”거나 “전쟁이 나도 나가 싸우지 않겠다”고 답한다. 어쩌면 갑남을녀가 자녀의 병역 면제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이민 갈 방법만 고민하고 있는 건 당연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국가는 젊은이들의 애국심 부족을 탓하기에 앞서 젊은이들이 애국심을 가질 만한 여건을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권력자라 할지라도 법 아래 일반 국민들과 같이 서 있는 정부. 자유 경쟁을 보장하되 경쟁 결과에 따른 보상의 격차는 적절하게 유지시키는 사회. 고위 공직자를 가리키며 자녀들에게 “훌륭한 분”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국가. 이런 모습이 일상이 될 때 국민들은 생활 속에서 뿌듯할 것이다. 언제까지 스포츠 중계를 보면서 확인하는 반쪽 애국심에 의존할 것인가. 국민들은 스포츠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정승훈 특집기획부 차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