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한다 아들아! 파푸아뉴기니 문성 선교사, 아들 성훈씨 장가 보내던 날
입력 2011-01-12 17:59
2011년 1월 8일. 서울 대치동 대치동교회 2층 본당. 문성(60) 선교사의 둘째아들 성훈(30)씨의 결혼식이 열렸다. 꽃길은 검소했고, 촛불은 작았다. 11시58분. 어림잡아 150여명이 참석했다. 2분 뒤엔 식이 시작된다. 멀리 훤한 신랑의 얼굴이 보인다. 첫사랑인 신부. 그녀와 9년간 열애했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성훈이 입장하자 문 선교사는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20년 전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를 따라 한국을 떠났던 아이. 파푸아뉴기니 정글로 떠나면서 호주에 두고 나왔던 아이. 그 아이가 오늘부터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가장이 된다. 하객의 박수를 받으며 주례 앞으로 나가는 아들의 발걸음은 세월만큼이나 빨랐다. ‘아버지 저 장가갑니다.’
호주로 가다
“아버지, 호주가면 돈 있어요?”
아들은 걱정이 앞섰다. 20여년 전. 아버지는 IT 관련 사업가였다. 집엔 컴퓨터가 있었다. 6학년생 또래에게 성훈이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좋은 것 다 남 주고 호주로 간다고 한다. “돈은 없고, 내 기술을 돈 버는 것에 쓰지 않기로 했단다.” 아버지의 답변이었다.
“그럼 누가 나를 학교에 보내주나요?” “하나님이 네가 학교 가야 하는 것을 아는데, 네 하나님께서 어찌 모르겠느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럼 내 신발은 누가 사줘?” 마이클 조던 신발을 꼭 신고 싶다던 아들은 헌 신발을 신고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해 문 선교사의 나이 마흔이었다.
문씨가 집사로 출석하던 교회에서조차 말렸다. 20년간 더 벌면 편안한 노후가 기다리는데 왜. 담임목사도 끝내 파송해주지 않아 산동네 작은 교회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고, 소머리국밥을 얻어먹었다. 출국 전 지인에게 받은 봉투 한 장. 내심 기대하며 뜯어봤건만 ‘하나님만 의지하세요’라는 종이 한 장뿐이었다.
문씨가 호주로 간 건 부족선교를 위해서였다. NTM(New Tribes Mission)은 문씨가 소속될 단체였다. 미국 플로리다주에 본부를 두고 호주 캐나다 등에 훈련센터를 둔 NTM은 세상이 감당 못할 선교사들만 모인 곳이다. 1943년 아마존 밀림에서 5명의 선교사가 부족민에 살해된 것이 NTM의 시작이다. 남태평양의 외딴 섬, 동남아 산간지역, 아프리카의 열대우림 등 비문명 지역의 부족 마을로만 들어가는 NTM의 선교사는 3200명.
발단은 ‘이따오’라는 비디오였다. 호주에서 온 선교사 부부가 틀어준 15분짜리 비디오테이프. 파푸아뉴기니 원시 부족들, 벌거벗은 그들이 성경 말씀을 듣기 위해 목사님 집 앞으로 몰려가는 장면이 문씨 부부의 가슴을 치는 바람에 ‘사고’를 치게 된 것이다. ‘내가 관념 속에서 믿음 생활했구나. 신발도 많고 옷도 많고 내가 너무 가진 게 많구나. 심지어 성경책은 10권이나 있구나.’ 원시 부족의 믿음이 참이라면 부부의 믿음은 거짓이라는 고백. 그날로 창세기 1장 1절부터 다시 읽었고 1년 뒤 NTM의 유일한 한국인 선교사로 문성, 이민아 부부는 이름을 올렸다.
우리 가족은 빈민
가족은 시드니 서부 루티힐에 정착했다. 부부는 센터에서 훈련을 받았고, 두 아들은 공립학교에 보내졌다. 학교에 간 첫날 성훈은 “아빠, 여긴 학교가 아니야”라고 말했다. 마약하는 아이, 갱단에 들어간 아이, 선생님에게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는 아이…. 며칠 뒤 성훈은 “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해요”라며 흐느꼈다. 또래보다 덩치만 컸지 화장실 간다는 말도 못하던 성훈은 ‘왕따’가 됐다.
생활고도 심각했다. 자동차며 옷이며 남에게 주고 온 것 또한 교만임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씨네는 유효기간이 지난 음식을 먹었다. 그나마 크리스천인 슈퍼마켓 주인이 줬기에 망정이지. 이어지는 문씨의 ‘참치 간증.’
“우리 성훈이가 참치를 참 좋아하거든요. 사줄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기도했어요. 기도하고 나니 유효기간 지난 음식 가운데 참치 통조림이 있어요. 살펴보니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았고 다만 찌그러진 캔인 거예요.”
감기처럼 찾아 온 장애
그러던 어느 날. 성훈이가 신발 끈을 매지 못한다. 연필을 줘봤다. 이름을 못 쓴다. 동그라미를 그려 보랬다. 한참을 가만 있는다. 입이 돌아갔고, 팔 다리도 휘었다. 병원에 데려가 7명의 의사로부터 일주일간 검사를 받았다. ‘normal(정상).’ 다시 검사해 본 바 35년 전 호주 의학계에 등록된 ‘culture shock(문화 충격)’의 일종이랬다. 성훈은 14세. 페니실린을 스물한 살 때까지 먹이라는 처방이 나왔다. 약을 거르면 심장마비로 죽는다는 경고와 함께.
“제가 오고 싶어 온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를 불러내셨잖습니까. 멀쩡하게 사업 잘하고 한국에서도 일년이나 기도한 뒤에 마음 열었더니. 아들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시면 제가 부끄러운 것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때 문씨 앞에 펼쳐져 있던 종이 한 장.
“기도제목을 적어놨더라고요. 기도 응답되면 ‘하나님은 내 편이야. 아멘하지요? 응답되지 않으면 언젠간 응답하시겠지라고 하고요. 근데 다니엘이 했던 고백이 생각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어찌하시든지.’ 그동안 합리화한거죠. 한 줌의 기도 제목 속에, 아무것도 아닌 신학의 지식 속에, 나의 생각과 감정 속에 감히 하나님을 제한한거죠.”
욥의 고백을 하던 날, 성훈이 돌아왔다.
아이를 다시 7명의 의사에게 데려갔더니 “unbelivable(믿을 수 없다)!”이라했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부부를 반긴 건 병원에서 날아온 청구서. 3700달러. 앞이 깜깜해지려는데 청구서 맨 마지막 한 줄. ‘당신의 의료비가 다 지불됐으니 사인해서 보내라.’ 감동한 의사가 대신 낸 것이다.
식인부족과 살다
성훈이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간 해 부부는 파푸아뉴기니 부족 선교사가 됐다.
해발 2500m의 고산 지대 ‘코라(Kora)’ 부족 마을. 길이 없어 650여명의 부족은 고립됐다. 물도 곡식도 없고 새조차도 날지 못하는 곳. 부족민은 풀로 덮은 움막에 살면서 고구마를 먹었다. 쥐 뱀 멧돼지 벌레 등 움직이는 모든 생명을 먹었다. 심지어 인육(人肉)도 먹었다. 그들은 매일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았다. 영양실조, 말라리아, 에이즈, 부족 간 전쟁은 한순간에 목숨을 앗아갔으니까. 피부색이 다른 문씨 부부는 이방인, 아니 먹잇감이었다.
부부는 “선교는 지배가 아닌 그들의 문화에 스며들어 그들과 함께 사는 삶”이라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움막에 들어갔다. 인간의 끝. 아기는 돼지 세 마리에 거래됐고, 남편은 홧김에 아내를 때려 죽였으며, 출산한 여자는 한 쪽 젖은 아기에게 다른 쪽 젖은 돼지에 물렸고, ‘남자의 집’에선 시도 때도 없이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일’이 벌어졌고, 늙은이는 임종 직전에도 소유물에 욕심을 내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문씨 부부는 베풀었다. 난생 처음 소금을 맛보게 해줬고, 옷을 줬고, 약을 먹여 병자를 살렸다. 하지만 그들은 “당신의 말을 들어준 대가”라고만 여겼다. 당신의 말이란 성경 말씀이다.
한편, 호주에 남겨졌던 두 아들. “부모님은 저희를 두고 가셨다지만 저희가 부모님을 보내드린 거예요.” 속 깊은 두 아들은 울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실지도 몰라”
“내일 아버지가 돌아가실 수 있으니 당장 호주로 와라.”
형 성민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호주로 향했다. 2002년 성훈이 교환학생으로 연세대에 다니던 때다. 아버지의 병명은 ‘박리성 대동맥류’. 대동맥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터지면 죽는 병이다. 성훈이 호주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의식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코라 마을을 방문했던 의료선교사가 뱃속에 혹이 잡힌다는 아버지의 말을 흘려들었더라면 두 번 다시 못 볼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수술은 잘 됐지만 신경 하나만 건드려도 죽을 수 있고, 걷지 못할 수 있어요.”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다. 지난해 11월 10일 대치동교회 수요예배에서 문 선교사가 했던 간증 한 토막.
“저는 인공동맥을 차고 있어요. 한국사람 중에 이걸로 살아난 사람이 없다네요. 혈압이 160이상 올라가면 3초 안에 죽습니다. 의사 말이 ‘당신 설교할 때 지금처럼 흥분하지 말라, 부족에게 가지 말라’에요. 저는 기도하면서 부족 형제가 고통 줘서 떠나겠다는 소리 수없이 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붙잡으셨고 모두 응답해주셨어요. 그런 나도 시간이 지나니 나 혼자 산 거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더란 말입니다. 근데 부족 청년이 이런 말을 해주더군요. ‘하나님이 선교사님의 핏줄을 두 손으로 쥐고 계셨노라.’”
16년이 흘렀다
부부가 코라 부족과 ‘동거’한 지도 16년이 흘렀다. 성훈은 호주의 작은 대학에서 칼리지로, 다시 명문 공과대학 UTS로 옮겨 총 8년간 대학을 다녔다. 부모의 지원은 한 푼 없었다. 성훈은 오는 5월 UTS를 수석 졸업한다. 전공은 산업디자인. 호주 내 디자인 대회는 모조리 석권했다.
“뛰다가 숨이 차서 멈추는 순간. 그 순간까지 달렸을 뿐이에요.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싶어서.”
목숨 걸고 선교하는 부모님을 떠올리면 멈출 수 없었다. 부족 마을을 세 번 찾아갔다는 아들. “저는 일주일도 못 버티는 그곳이 부모님에겐 천국이에요. 물을 달라고 기도하면 비가 내려요. 매일매일 하나님을 만나시는 거죠.”
더 깊은 정글로 들어 가달라는 아들의 기도 덕일까. 코라 부족은 문씨 부부가 안식년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간다니 영영 못 볼 사람마냥 슬퍼했다.
“다리와 목을 붙잡고 저희를 놓아주려 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떠나면 그들은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약을 줄 사람도 아이를 받아줄 사람도 소금을 줄 사람도, 춥고 떨릴 때 옷을 줄 사람도 없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너희들이 주 그리스도를 만나 기뻐하는 사실을 전하려고 한다. 그랬더니 이구동성으로 가라고 합니다. 저는 한 사람의 파푸아뉴기니 선교사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 어려움과 공포와 힘든 것을 능히 이기며 저를 보내주었습니다.”
문 선교사가 죽으면 존경의 뜻으로 그의 두 다리를 먹겠노라고 약속한 코라 부족. 그들은 이제 문 선교사가 만들어준 문자 ‘미희(mihi·고구마라는 뜻)’를 배워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지혜로운 신부, 그리고 나의 아버지
“나 최은실은 문성훈군을 그리스도 안에서 남편으로 맞이하여….”
신부 은실(31)씨가 결혼서약을 읽어갔다. 아버지가 그랬듯 첫사랑과 결혼하는 성훈. 그녀는 가난한 선교사의 아들에게 “당신은 재벌이에요”라고 말해주는 지혜로운 여성이다. 온두라스 이민 가정의 딸로 현재는 호주 의류회사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우리 둘은 네가 사랑하는 만큼 그 아이를 사랑할 준비가 돼 있단다.” 문씨는 딸처럼 며느리를 꼭 끌어안아줬다.
성훈·은실 부부는 호주에 신방을 차렸다. 주마다 세를 내는 작은 집엔 냉장고, 세탁기, 침대뿐이다. “다 채워주시겠죠.” 성훈은 살아계신 아버지가 간증이듯, 매일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기쁨을 알고 있었다.
성훈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아아. 아버지요. 저는 나중에 아버지 같은 선교사를 꼭 만나고 싶어요. 만나서 그때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노라고….”
그런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하객들 앞에서 기도했다.
“우리 문성훈, 저희 둘째아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고난 가운데 있게 하사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며 고난을 기뻐한다는 사도 바울의 간증이 되는 귀한 삶을 누리는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창 밖엔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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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경선 기자·사진 김태형 선임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