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빛 수놓는 찬란한 여명… 겨울 태백산 정상에서 맞는 황홀한 해돋이

입력 2011-01-12 17:54


“산은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길은 갈수록 가늘어졌다. 축 늘어진 회나무와 언건한 떡갈나무가 마치 귀신처럼 서 있다. 바람과 불에 꺼꾸러져 있는 나무가 언덕에 옆으로 누워 길을 끊었으나 눈이 쌓여서 형체가 흐릿하다. 서 있는 나무들은 바야흐로 억센 바람과 싸우느라 그 소리가 허공에 가득하다. 동쪽에서 진동을 하면 휘이휘이 서쪽에서 메아리를 친다.”

조선 영조 때의 선비화가 이인상(1710∼60)이 묘사한 겨울 태백산의 풍경이다. 그는 1735년 겨울에 태백산을 사흘 동안 유람하고 유태백산기(游太白山記)라는 수필집을 남겼다. 송하관폭도와 설송도를 그린 화가이자 선비인 이인상의 글은 서정적이고 사실적이라 눈앞에서 태백산을 보는 듯하다.

태백산 산행의 참맛은 정상에서 맞는 황홀한 해돋이와 고사목으로 변한 주목에 핀 상고대와 눈꽃을 보는 것이다. 여기에 운해가 흘러 백두대간 봉우리들이 다도해 섬처럼 펼쳐진다면 금상첨화. 3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석사조의 풍경을 만나려면 신새벽에 산을 올라야 한다.

여느 태백산 산행로와 마찬가지로 유일사 코스도 대체로 평탄하지만 들머리는 제법 가파르다. 발목 깊이로 쌓인 눈을 헤치고 나가자 하늘을 가린 낙엽송 가지 사이로 별빛이 쏟아진다. 별빛이 눈길에 반사되어 숲 속으로 흩어지고,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는 별빛을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다시 눈을 밟으며 산등성의 길을 열었다. 바라보이는 곳이 멀어질수록 흰 눈도 점점 깊어지고 바람도 점점 매서워지며 숲의 나무는 점점 짧아졌다.”

유일사 쉼터를 지나자 이인상의 표현처럼 등산로는 오솔길로 바뀌고 쌓인 눈은 무릎 높이로 깊어진다. 키가 점점 작아지는 참나무 군락지를 지나자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주목이 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다.

태백산에 자생하는 주목은 약 4000그루로 중턱부터 장군봉(1567m) 아래까지 드문드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령 900년이 넘는 거대한 주목은 태백산을 지키는 터줏대감. 고려 초기에 뿌리를 내렸을 최고령 주목은 ‘살아서 천년’을 증명이라도 하듯 무성한 잎에 화려한 눈꽃이 피어 있다.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주목 고사목은 약 20여 그루로 장군봉 주변에 흩어져 있다. 가슴 높이의 철쭉 군락 사이에 뿌리를 내려 더욱 돋보이는 최고령 고사목의 나이는 산 날과 죽은 날을 합해 약 1000년. 숱한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산증인이지만 굵은 줄기에 기하학적 형태의 가지만 남은 모습은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를 연상하게 한다.

암청색 하늘이 희부옇게 밝아온다. 매서운 칼바람이 능선을 할퀼 때마다 주목 가지에 핀 눈꽃이 부서져 은가루를 날린다. 멀리 동쪽 하늘이 드디어 오렌지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수평선을 뒤덮은 구름 위로 오렌지색 기운이 점점 강해지더니 주목 가지 사이로 눈부신 빛 덩어리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순간 장군봉 주목 군락지에 찬란한 아침햇살이 스며든다. 햇살에 젖은 고사목 가지가 연분홍으로 물들고 햇살을 등진 가지는 남태평양의 산호처럼 하얗게 빛난다. 태양이 시시각각 고도를 높이자 칼바람에 연신 비명을 지르던 철쭉나무도 새악시 얼굴처럼 연분홍색을 띤다. 상고대와 아침햇살이 만나 어떤 물감으로도 흉내 못 낼 대자연의 색채를 창조하는 순간이다.



주목 가지 끝에 해가 걸릴 때쯤 태백산 정상에선 또 다른 장관이 연출된다. 북쪽으로 화방재를 건너 함백산(1573m) 은대봉(1442m) 금대봉(1418m) 매봉산(1303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봉우리들이 운해 위에 우뚝 솟아 다도해의 섬을 연출하고 있다. 남동쪽으로는 구룡산(1345m) 면산(1245m) 백병산(1259m) 응봉산(998m)이 중중첩첩 열두 폭 산수화를 그린다. 사방을 둘러봐도 운해를 뚫고 불쑥 솟은 백두대간 봉우리들뿐이다.

이인상은 이 광경에 취해 “사방 백리에 산이 모두 흰 눈빛이어서 마치 뭇 용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듯도 하고, 마치 일만 필의 말이 내달려 돌진하는 듯도 하다. 안개 속에 불쑥 드러났다가 사라져 없어지고, 어두컴컴하다가 활짝 열리기도 하면서, 번쩍번쩍 반짝반짝, 희디희고 맑디맑게, 빛의 기운이 허공에 가득하다”고 읊었다.

이인상과 동시대 인물인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구름 가듯 물 흐르듯 하며 하늘에 닿아 북쪽이 막혔고, 때때로 자색 구름과 흰 구름이 그 위에 떠 있기도 한다”고 태백산의 운해를 극찬했다. 겨울 아침 태백산 정상에서만 만나는 감동의 풍경들이다.

일찍이 선인들은 ‘설악산은 가산(佳山), 오대산은 명산(名山), 태백산은 영산(靈山)’이라고 했다. 설악산보다 높지 않고 오대산보다 화려하지 않은 태백산에 왜 영산이라는 수식어를 붙었을까.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중심에 태백산이 위치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장군봉을 비롯한 세 개의 봉우리에 예로부터 천제단이 있기 때문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으면 겨울나무와 겨울바람이 만나 싸우는 이른 새벽에 태백산을 올라 ‘삽시간의 황홀’을 맛볼 일이다.

태백=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