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탁석산의 스포츠 이야기] 복싱 영웅 파퀴아오

입력 2011-01-12 17:47


현역 세계 최고의 복서는 누구일까? 두말할 필요 없이 매니 파퀴아오이다. 권투 전문지 ‘링’이 체급을 불문하고 매기는 세계 랭킹에서 2년 6개월째 1위를 하고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파퀴아오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필리핀 출신으로 1995년 프로 데뷔 후 8체급을 석권했다. 플라이급으로 시작해서 지난해 11월에는 슈퍼웰터급 타이틀마저 차지했다. 이때 받은 대전료가 2500만 달러(약 280억원)였다니 그의 가치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필리핀의 복싱 영웅으로 그의 시합이 있는 날은 국회의원도 필리핀 반군도 손을 놓는다고 한다. 지난해 5월에는 하원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의 시합을 케이블을 통해 본 적이 있다. 한마디로 환상적이었다. 물러설 줄 모르고 전진만 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치고 빠지면서 관리하는 복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상대라도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자세가 좋았다. 멕시코의 3인방과도 모두 싸웠으며 미국의 ‘골든 보이’ 오스카 델 라 호야와도 싸웠다. 자신의 체급에는 적수가 없어 체급을 올리다 보니 처음보다 19㎏ 불어난 것이다. 누구와도 붙는다.

체급을 올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싸운다는 정신이 좋다. 그런데 그의 진가는 기술에 있다. 링 위에서 못 치는 펀치가 없다. 어느 각도에서든 펀치가 나오고 매우 정확하다. 이뿐 아니라 파괴력도 있다. 체중은 불었지만 스피드는 떨어지지 않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그의 시합을 보면 격투기가 아니라 한 편의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다. 격렬한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고 아름답다고까지 느낀다. 태도와 힘과 기술이 하나가 돼 작품을 만들고 있다.

철학용어에 아레테라는 말이 있다. 훌륭하다는 뜻인데 기본적으로는 기술이 최고 경지에 오른 것을 말한다. 흔히 발이 빠른 것이 발의 아레테이고 토지가 비옥한 것이 토지의 아레테라고 한다. 이와 같다면 복서의 아레테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승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힘과 기술이 조화가 돼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닐까. 이럴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구두 수선을 매끄럽게 해줄 때 수선공의 손놀림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드라마에서 딱 맞는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치는 연기자를 보면 사람들은 감탄한다. 그러고는 말한다. 예술이라고. 아레테를 맛보는 것이다.

나는 스포츠에서 아레테를 맛본다. 물론 승부조작이나 맥 빠진 경기에서는 추함을 맛보지만 그것은 예외적이다. 우리가 스포츠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장면을 많이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아레테이기 때문일 것이다. 농구의 슛 장면처럼 한 컷의 아레테도 있고 파퀴아오가 보여주는 연결되는 아레테도 있다. 그의 시합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한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아레테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올해에는 그의 시합이 생중계됐으면 좋겠다. 실시간이 주는 감동이 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