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으로 본 기독교 100년] 신학월보(1900년 12월 창간, 감리회 발행)

입력 2011-01-12 17:49


‘신학월보’는 감리교 선교사 존스가 주도하여 창간한 한국 최초의 신학 잡지이다. 1900년 12월 창간 이후 1904년까지 월간으로 발행되고 2년간 중단되었다가 1907년 7월 복간되어 1910년 가을까지 격월간으로 발간되었다.

이 잡지는 신학 교회사 성서주석 설교학 등에 관한 논문과 논설, 신앙고백, 교회 관련 기사 등을 싣고 있다. 신학 전문 잡지이지만 순한글로 되어 있어 일찍부터 한국 신학의 형성에 공헌하였다. 또한 신학서적이 거의 없던 기독교 초창기에 신학교의 교재 역할을 함으로써 목회자 양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신학월보’는 창간호에서 발간 목적을 이렇게 밝힌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학의 논리, 성경 도리, 교회 사기, 한국교회의 진보, 교인의 신명(神命) 역행과 덕행 개정 등의 갖가지 일을 게재할 것이니 우리 교회 목사들과 선생들이 도와주시기를 바라노라.’ 여기에서 ‘신명 역행’이란 한국의 선비가 목숨 바쳐 공부하듯이 ‘자기 영혼을 구원하고 길러주는 경영을 주야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혹독하게 힘써 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신학월보에는 편집 발행 책임을 맡았던 존스 등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교회의 초창기 선구자들인 김창식 전덕기 오석형 최병헌 박에스더 구춘경 등 사십 명이 넘는 한국인 필자가 등장한다. 특히 최병헌은 한국인 최초의 신학논문인 ‘죄도리(罪道理)’를 신학월보 1901년 7월호에 기고하였다. 그는 ‘죄도리’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성서의 가르침으로 전개하였다. 그의 대표 저서인 ‘셩산명경’도 1907년 신학월보에 연재한 ‘셩산유람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 언론인이며 임시정부에서 외무총장을 지낸 박용만 등이 보낸 신앙 기고문도 눈길을 끈다. 이승만은 고종폐위 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는 중에도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그가 감옥에서 신학월보 1903년 5월호에 보낸 ‘옥중전도’에 이러한 내용이 나와 있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밉게 여겨 물리칠 것이 아니오, 사랑하여 하나님 도(道)로 가르치면 스스로 감화하여 의원이 병자 고친 것같이 효험이 드러날지니 이것이 나의 깨달은 바이오. … 작년 가을에 괴질이 옥중에 먼저 들어와 사오일 동안에 육십여 명을 목전에서 쓸어내일새 심할 때는 하루 열일곱 목숨이 앞에서 쓰러질 때에 죽는 자와 호흡을 상통하며, 그 수족과 몸을 만져 곧 시신과 함께 섞여 지내었으되 홀로 무사히 넘기고 이런 기회를 당하여 복음 말씀을 가르치게 되매 기쁨을 이기지 못할지라.’

항일 무장투쟁을 주장한 박용만은 신학월보 1904년 6월호에 기고한 ‘십자군의 격서’를 통하여 당시의 민족 상황을 비판하며 신앙의 진군가를 힘차게 부른다.

‘어느 나라나 어느 사람이 도무지 죄 없는 자 없거니와 그중 더욱 심하고 당장 멸망에 임한 자는 오직 우리 동양의 청국과 한국뿐이라. 슬프다. 옛적의 문명기상이 오늘 다 어디 갔으며 기왕의 예의 풍속이 오늘 또 어디 있느뇨. … 아무리 생각하여도 능히 이 세상을 대적하고 이 인생을 구원할 자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우리 구세교 십자군 형제들뿐이요.’ 그리고 ‘구세주의 지휘 받아 만만 원수 대적하고 승전 찬미하는 날에 평등지위도 온전히 회복하고 자유권리도 차례로 다시 찾아 일만 입 한목소리로 하나님 찬미 함께 불러 나아가자고 한다.’

신학월보는 감리교의 선교잡지에서 나아가 기독교와 민족운동을 결합시킨 개화기의 언론 매체라고 할 수 있다.

부길만 교수(동원대 광고편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