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아흔 앞둔 서영훈 이사장의 기도

입력 2011-01-12 16:50


해가 갈수록 마음은 청년같이 젊어진다는 ‘구십춘광(九十春光)’은 서영훈(89)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공동선) 이사장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더 유명하다. 31세에 청소년적십자국장으로 시작해 사무총장을 거쳐 총재까지 역임했다. 흥사단과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 등 수많은 단체를 이끌었다. 1970년대 초반에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라는 표어로 환경운동을 시작했다. 장준하 선생과 함께 ‘사상계’의 모태인 ‘사상’을 발행, 민족 지성사에 큰 획을 남겼다. 노태우 정부시절 KBS 사장을 지낸 때와 DJ 정부 때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지낸 것 빼고는 줄곧 사회단체에 몸담았다. 서 이사장은 서울 돈의동 초동교회 원로장로다. 지난 6일 서울 수송동 공동선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평안도 사투리가 섞인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소한 추위도 멈칫했다.

코리아 레드 크로스 ‘미스터 서’로 통해

-지난해 말 미수를 맞아 회고록 ‘도원(道原)’을 발간하셨지요.
“‘돌아볼 회(回)’라기보다는 ‘참회할 회(悔)’자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듯합니다. 88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일이 많고 부족한 것도 많아서 그냥 ‘회고담’이지요.”

-소년시절부터 목사나 신부, 아니면 스님이 됐을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해방 전에는 무교회주의자들과 간디의 영향을 받았지요. 해방 후에는 함석헌, 류영모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인류애나 인도주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 내 생활의 목표였지요.”

-1953년에 대한적십자(한적)에 들어가 30여년 동안 한 우물을 파셨더군요.
“180여개 나라의 적십자 총재들 중에서 내가 제일 오래 했지요. 지금도 ‘코리아 레드 크로스’하면 ‘미스터 서’로 통한다나요.”

-예전이나 지금도 수장을 하려고 애를 쓰지 않은 분으로 알려졌는데요.
“한적에 들어갈 때부터 그랬어요. 사무총장이 될 때도 그랬고 총재가 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KBS 사장 자리와 새천년민주당 대표도 내가 원해서 된 것은 아니었어요. 지나고 보내 후회스러운 일도 더러 있더군요.”

사상계 뿌리 ‘사상’ 발행, 환경운동 첫 시작

-고향이 묘향산 남쪽 평안남도 덕천이지요. 왜 월남하셨나요.
“해방이 되고 1년 동안 고향에서 부친을 도와 농사를 지었어요. 17세 때부터 불붙기 시작한 신앙심이 깊어질 때였죠. 공산당과 코드가 안 맞았어요. 애국가를 부르는데 ‘하나님이~’를 ‘인민들이~’로 바꾸는 것에 참을 수 없더군요. 그래서 38선을 걸어서 서울에 와 민족청년단 청년간부 훈련에 참가했어요. 이 곳에서 백범 김구 조소앙 이범석 정인보 안호상 장준하 김준엽 등 눈부신 민족주의자들과 만났습니다.”

-사상계 전신인 ‘사상(思想)’ 잡지를 발행하셨지요.
“장준하 선생은 자존심이 매우 강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술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술을 마실 때도 그는 식탁 위에 성경책을 올려놓고 기도를 했어요. 6.25가 터지고 부산 피란시절 백남준 당시 문교부 장관이 원장으로 있던 국민사상 지도원에 근무하면서 그와 함께 함께 상상계 전신인 ‘사상’지를 펴냈어요.”

-서 전 총재하면 환경보호운동, 적십자사 헌혈운동 등이 떠오르는데요.
“솔직히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환경보호가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어요. 그때 적십자사 주관으로 하루 4시간씩 1주일간 공해방지 교육을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효시가 됐어요. 당시 환경보호 표어 현상모집을 했는데, 응모작품 중에서 손질을 해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라는 표어를 만들었지요.”

-호가 가운데를 뜻하는 ‘가온(嘉溫)’인데 어떤 의미가 있나요.
“함석헌 선생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 선생의 핵심 철학이 가온 철학이었어요. 천하의 중심, 절대 깨지지 않는 진리, 즉 가온이지요. 내가 감히 욕심을 내어 다석 선생님께 ‘호를 가온으로 정했으면 좋겠습니다’ 했더니 괜찮다 해서 호로 삼았지요. 이것을 한글로 쓰면 이해를 못해서 한문으로 아름다울가(嘉) 따스할 온(溫)으로 썼지요.”

민족경제공동체 만들자는 아이디어 좋아요

-2010년은 ‘충격과 분노’로 얼룩진 한 해였습니다. 상반기엔 백령도 앞바다에서 천안함이 두 동강났으며 하반기엔 연평도가 쑥대밭이 됐습니다. 평화롭던 한반도가 왜 이 지경이 됐을까요.
“허술하면 뚫리게 마련입니다. 북한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공격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만한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은 것을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렸어요.”

-연평도 공격으로 남북 정세가 불안정해진 것은 물론이고 젊은 세대들에게까지 ‘쳐부수자’라는 생각이 늘어났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상대적입니다. 대화가 끊어지면 평화도 깨진다는 것은 역사적 교훈입니다. 개인과 조직도 그렇고 국가나 민족간에도 마찬가지죠.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떠한 경우라도 대화의 채널을 닫으면 안 됩니다.”

-새로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좋은 해법이 있으신지요.
“이명박 대통령이 제안한 것 중에 아주 좋은 것이 있어요. 민족경제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인데,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중요해요. 통일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죠. 국민의 자발적인 동의가 절대적인 거죠.”

-통일은 언제쯤, 어떻게 실현될까요.
“지난해가 가장 어려웠어요. 예언가들도 그렇게 전망했었죠. 6.25전쟁도 경인년에 터졌잖아요. 북한이 갑자기 무너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김정은이 권력을 계승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남한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어요. 통일은 새벽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옵니다. 1945년 그 해도 그랬어요. 그래서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 폭행사건 세상 욕심이 낳은 죄

-연초부터 목회자 폭행 사건 등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생겨서 참 안타까운데요.
“뉴스를 보고 놀랐어요.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니 믿을 수가 없더군요. 세상 욕구에 눈이 멀어 비롯된 것이죠. 안 그래도 기독교인이 감소한다는 등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데, 걱정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요.
“남을 차별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으면 됩니다. 도와줘야 할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절대로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아직도 20개가 넘는 단체를 이끌고 계시는 건강 비결이 궁금합니다.
“매일 해거름에 5000보에서 1만보 정도 걸어요. 잠들기 전에는 꼭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지구촌 살아있는 생명체를 잘 보호해달라는 것과 하나님 영광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세상이 되도록 간구하죠. 대한민국과 북한동포, 600만 한인 디아스포라의 평안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들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며 축복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전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서영훈 이사장 연보

-1923년 평남 덕천생

-1942~1943년 국가보안법 등 위반 영변경찰서 구금

-1952년 ‘사상’지 편집

-1953년 대한적십자사 입사, 청소년적십자 국장

-1959년 국제대학 국문과 3년 수료

-1980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초동교회 장로

-1982년 대한적십자사 퇴임

-1983~1986년 흥사단 이사장

-1988~1990년 KBS 사장

-2000년 새천년민주당 대표

-2001년 대한적십자사 총재

-2006년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2010년 생명평화선언대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