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자연-일본 치산치수 영웅에게 길을 묻다] (中) 죽음으로 8㎞ 운하 뚫다-기요하라 타헤에

입력 2011-01-12 18:04


관리와 공유 주민과 대화 종교계는 설득… 대역사 기초공사는 ‘소통’

4대강 개발사업에 대해 8개 교단 협의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사업 중단을 촉구한 반면 보수 성향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고질적 물 문제 해결과 지역 활성화”를 이유로 지지 입장을 밝혔다. 이에 따라 국민일보 ‘이웃’은 17∼18세기 일본 치산·치수 영웅 세 사람의 개발 사례를 통해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를 해봤다.

인력만으로 대자연의 흐름을 바꾼 역사(役事)는 200∼300년이 지난 지금도 생태의 순환을 반복하며 그 공과를 후대가 안으며 살고 있다. 그 현장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일본 이즈모반도의 사다운하가 개통된 지 올해로 223년째다.

우리의 동해를 면하고 있는 사다운하는 일본 막부시대 일개 번(藩)의 치수 역사일 수 있다. 18세기 후반의 그 역사(役事)는 토목·건설 기술이 현격히 차이가 나는 이즈음과 단순 비교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자연은 개발 후에도 후대가 대대손손 물려받아 삶의 터전을 삼는다는 점에서 ‘그 후 200여년’은 케이스 스터디가 되기에 충분하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땅을 인격화해서 그 창조력을 땅에 위임(창 1:12)했다. 그러기에 생태 질서의 관점에서 볼 때 땅은 생산과 생명의 주체다. 그러나 기술문명의 발전은 기후온난화와 생태질서의 교란을 불렀다. ‘씨 맺는 식물과 열매 맺는 나무’는 인간생명 유지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인데 이를 땅을 통해 어떻게 잘 다스리느냐가 지구공동체의 관건이 됐다.

이에 세계 기독교는 인간 구원 중심의 신학에서 생태계 전체를 구원의 대상으로 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했다. 크리스천뿐만 아니라 타 종교인조차 4대강 개발에 대해 깊이 고뇌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 간에 안고 있는 ‘숙제’ 때문이다.

유랑 걸식 농민 위해 나서다

사다운하 개발 과정은 관(官) 농민 종교계 등이 얽힌 난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제의 시대라고 해도 농민의 뜻을 막무가내로 거스를 수 없었으며 종교계가 자연 훼손을 보는 시각에 등을 돌릴 수 없었다. 또 관 내부에서도 사업의 타당성은 공유하나 막상 실무에 들어가면 예산 문제와 구성원 간 파워게임으로 목적을 달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기요하라 타헤에(1711∼1787)는 일본 전국시대의 명장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울지 않는 새를 ‘울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로 운하를 개발했다. 10대 때부터 홍수 피해로 유랑 걸식하는 농민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치수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76세에 운하 개통을 목전에 두고 숨을 거두었다. 그가 완공한 운하의 길이는 길이 8㎞, 폭 36m이다.

지난 성탄절 동해 바다가 펼쳐진 일본 마쓰에시 에쿠모항. 내륙 신지코(湖)에서 흘러 내려온 강물이 바다에 닿는 작은 포구다. 거센 눈보라와 강풍으로 몸 가누기가 힘들었다. 운하에 정박한 요트마저 요동친다. 잘 정비된 보(洑)를 따라 상류로 거스르는 운하길은 이제는 한가한 강물일 뿐이다.

그러나 한때 이 운하는 이즈모 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대도시 오사카, 에도 등으로 운송하던 중요한 수운로였다.

“에도시대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기다마에센(北前船)이 있었어요. 이즈모 평야의 쌀도 기다마에센을 통해 오사카, 에도, 홋카이도 등으로 운송됐습니다. 한데 사다운하가 생기면서 이 운송선이 이즈모반도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됐으니 물류혁명을 가져오게 된 것이지요. 18세기만 하더라도 수운 수단이 가장 효과적이었지요.”

이즈모 지방 역사가 사사키 다케오씨가 보를 따라 걸으며 설명했다. 운하가 개발되기 전에는 우측 해안선을 따라 계속가다 사카이미나토항(상단 지도 참조)을 거쳐 나카우미와 신지호수로 돌아와야 했다. 이 운송로 길이가 대략 100㎞. 하지만 사다운하가 완공되면서 10분의 1로 줄었다.

그러나 당시 이즈모 농민에겐 운하가 절박한 문제가 아니었다. 큰 비가 왔다 하면 곡창지대가 물에 잠기고 마는 홍수가 당면한 현실이었다.

재정 이유, 치수 외면하는 막부

1639년 대홍수. 전 재산을 털어 간척사업을 벌였던 오오카지 시치베에가 18세에 겪었던 물난리였다. 홍수 직후 마츠에번은 텐진강을 만들어 치수에 힘썼으나 수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험한 산골짜기를 따라 물이 일시에 신지코로 흘러들면 삽시간에 평지가 물에 잠겼다. 평야는 물론 시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기요하라 타헤에는 농사꾼의 아들이었다. 무사적 기질을 갖춘 데다 총명했다. 그는 10세 무렵 우연히 마쓰에번의 무사 아오누마 로크로우 우자에몬이란 인물을 만나면서 물리가 트이게 된다. 요즘으로 치자면 고시를 목표로 한 꿈을 갖게 되는 셈인데 그 말단 무사의 꿈을 15세에 이룬다. 1721년과 22년 홍수로 신지코가 넘쳐 유랑민이 발생한다. 번의 말단이 된 그는 농민을 위해 무엇이 해결해야 할지 결심을 하게 된다. 아오누마에게 “왜 번은 홍수가 나지 않게 고치지 않느냐”고 따지던 당돌한 인물이기도 했다.

1732년 일본 열도를 강타한 자연재해는 식량난을 가져왔다. 이즈모반도 역시 대홍수로 폐허가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메뚜기떼까지 극성을 부려 일본 전국에서 수십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이때 기아에 허덕이던 사람들이 흙까지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청년 타헤에는 신지호수의 수위를 내리면 홍수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수리 시설 공사로 농민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와 후견인 아오누마가 죽자 치수의 꿈이 흔들리게 된다. 그가 공복으로서 뜻을 펼치게 한 것은 어머니다. 장남이었던 그가 가업을 잇지 않는 것에 실망치 않고 “신지 호수의 홍수를 꼭 막아 달라”고 독려하곤 했다.

타헤에는 번의 공복으로 출세해야 치수 사업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47세에 칼을 차고 다닐 수 있는 정식 무사가 됐고 10년 뒤 치안담당, 행사관리담당, 노사담당, 감사담당 등을 거치게 된다.

“1784년 홍수는 마쓰에성 밑까지 차오르는 위협적인 것이었어요. 재정을 이유로 나 몰라라 하던 번의 관리들이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타헤에의 운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10대 때의 계획이 70대가 되어서야 실천할 기회가 생긴 거죠.”

사사키 다케오씨는 “홍수로 먹을 것이 없는데도 쌀로 세수를 걷어 왔던 번의 경직성에서 알 수 있듯 타헤에의 제안 역시 영주 등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어서 묵살 당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헤에를 견제하려는 정치 세력은 지난 10여년간 홍수 피해가 없다는 점을 들어 고속 승진을 거듭하던 그를 견제했다.

한데 이 무렵 대를 이은 젊은 성주 하마사토가 치수 무대책을 꾸짖자 실권을 쥔 반대파가 어쩔 수 없이 타헤에를 알현시킨다. 가혹한 세금 등에 따른 농민 반란이 그 배경이었다.



권력에 돈 되는 강 개발

타헤에는 성주에게 타크강과 쥬타유강의 원류를 관통해 운하를 만들자고 보고한다. 마치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해 운하를 만드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홍수피해 예방, 늪지대 간척, 여객수송, 농산물 및 해산물 운송과 같은 다목적 개발이었다. 번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공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타헤에의 생각이었다. 공사기간 3년, 작업자 연인원 7만명, 품삯 쌀 1만6000섬. 희생을 각오한 타헤에와 달리 성주의 계산은 달랐다. 운하를 개발해 배의 통행료를 받겠다는 것. 번의 영구적 수입이라는 것이 명확해지자 전폭 지원에 나섰다. 국가공공사업의 진짜 의도가 드러난 셈이다.

타헤에 나이 73세 되던 해 공사가 시작됐다. 10개 마을에 걸쳐 수용 토지가 발생했고 당연히 농민이 반발했다. 공사 현장에 울타리를 둘렀으나 농민이 번번이 뽑아 버렸다. 상명하복이 엄한 일본 막부시대라는 걸 감안하면 그 반발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농민들은 논으로 보상한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타헤에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다. 밤에 몰래 울타리와 측량 공사에 나서 일을 진행했던 것. 늪지대엔 밤에만 나오는 게가 있었는데 오늘날 ‘타헤에 게’라고 부르는 이유다. 타헤에가 넘어야 할 또 다른 난제는 종교계였다. 사다신사가 반대하고 나선 것. 신사 정문 앞으로 운하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더구나 몸을 맑게 한다는 연못 ‘미즈미이케’가 개발 사업으로 마르게 됐으니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만난 사다신사 책임자(宮司) 아사야마 요시쿠니(79)씨는 이렇게 말했다.

“종교와의 마찰은 그 해결이 쉽지 않습니다. 타헤에의 경우 신사를 수백 번 찾아 농민을 위한 개발임을 강조하고, 성소(미즈미이케)를 대신할 곳을 만들어 정성을 기울였어요. 사업의 정당성과 진심이 우선되니 신사가 양보했다고 합니다.”

타헤에는 또 사찰 측 설득을 위해 매일 바닷가에서 몸을 씻고 사찰까지 2㎞를 걸어와 기도를 드렸다.

데라이 도시오(향토사학자)씨는 “18세기 말 토목 기술로 늪지대에 운하를 건설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실패를 거듭하며 기술 축적을 해 나갔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다강(운하)은 그래서 완공됐다. 수십 명의 인부가 늪 공사 과정에서 죽었고, 개통 직전 타헤에 역시 생을 마감했다.

26일 다시 둘러본 사다강 일원. 운하는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한국의 군 단위가 그렇듯 이곳도 친수환경을 조성했어도 인구 감소로 이용할 사람이 없다. 요트계류장 정도나 활기가 있을 뿐이다.

200여년 전 지금과 같이 생태계 문제는 고려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쌀 생산 증가와 치수가 목표였다. 사다 운하는 당대에 이익을 창출했다.

그러나 이산이수(移山移水)가 가능한 현대의 인공자연은 국가가 관리능력을 상실할 때 흉물과 재앙으로 되돌아올 수 있음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취재 지원 : 일본 재단법인 인간자연과학연구소

이즈모(일본)=글 전정희 기자, 사진 윤여홍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