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수지 (14) 한국인 최초 간호학 박사학위 받아

입력 2011-01-12 17:39


다음 날 다른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7점을 받은 미국 학생도 있었다. 내 점수가 제일 높았다. 그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 이름은 하디(Hardy)였는데, ‘닥터 하디 코스’는 너무 ‘하드하다’(어렵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남편이 깨지 않도록 화장실 변기에 앉아 밤새 불을 켜고 공부를 하며 첫 학기를 마쳤다. 자심감이 생겼다. 학교에서도 다행히 한국 석사학위를 인정해 주면서 박사과정을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줬다. 그리고 미 국무성에서 주는 특별 장학금도 받게 됐다. 뿐만 아니라 지난 학기의 학비도 환불해 주고 닥터 하디의 조교가 돼 조교 수당까지 받게 됐다. 이 모두가 참으로 기적 같은 일들이었다.

장학금을 받자 그간 MIT 기숙사에서 살던 우리 가족은 유대인들이 사는 동네의 방 두 칸짜리 아파트를 얻어 이사를 했다. 당시 남편과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며 빠듯하게 살면서도 장학금을 받아 시댁과 친정에 거르지 않고 생활비를 보내줄 수 있었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는데 졸업과 동시에 이 장학금 제도가 없어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박사과정 입학생 심사가 이미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내 서류가 접수됐는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세 명의 교수와 면접한 후에 그 자리에서 입학 허가를 받게 됐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세 교수 역시 ‘우리가 왜 그 시점에서 그 학생을 면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댔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2년 8개월 후 간호학 박사학위를 받게 됐을 때 장학금 제도가 때를 같이해 없어진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믿는다.

1978년 5월 졸업식에서 나는 박사학위를 받았다. 입학 동기가 모두 6명이었는데 박사학위 졸업생은 나 혼자였다. 전체 졸업생 중에서도 석사학위 수여자는 200명이었지만 박사학위는 내가 유일했다. 마치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간 듯한 기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한국 최초의 간호학 박사라며 신문마다 크게 보도됐다.

이후 나는 연세대 교수로, 남편은 한국개발연구원 수석연구원으로 제의를 받고 귀국했다.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연세대 의과대학 강당에서 내 박사학위 논문을 주제로 강의를 하게 됐다. 당시 연세대 전산초 간호대학장은 국내 최초의 간호학 박사를 자랑하고 싶어서 의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는 등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 그런데 강의 시간인 오후 2시가 다 됐는데도 의사들은 서너 명밖에 오지 않았다. 250석 자리에 교수들과 병원 간호사 등 40∼50명만 앉아 있어서 강당은 썰렁했다.

강의가 시작되자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한 사람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의자에 앉지도 않고 팔짱을 낀 채 서서 강의를 지켜봤다. 통증을 경감시키는 ‘유사실험연구’ 박사학위 논문 발표가 끝나자 통증클리닉 센터장인 노(老) 교수님이 손을 들고 일어났다.

“우리 의사들은 서술 통계 정도밖에 안 쓰는데 박사님은 고급 통계를 쓰셨더군요. 감탄했습니다. 앞으로 같이 연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걸로 나의 강의에 대한 의혹과 불신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 뒤로 내가 병실에 나가면 사람들이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수군댔다.

“우리나라 간호학 1호 박사래.”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