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꿈을 길어 올릴 두레박

입력 2011-01-11 18:48


창가의 햇살이 따뜻해 보여 찻잔을 들고 다가갔다. 기척을 느꼈는지 작살나무에 앉은 참새 세 마리가 호르르 날아간다. 날마다 태백준령을 넘어 출근하는 친구가 시를 한 편 썼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읽은 감상을 답 메일로 몇 자 적어 보내도 되지만, 목소리를 들은 지도 오래돼 전화기를 들었다.

그는 강원도의 겨울 소식을 전했다. 겨울나무에 달린 은백의 서리꽃이 장관이라며 진경산수화가 따로 없다고 했다. 나는 한 달 뒤에 후배들을 대상으로 직무실무 강의를 맡게 됐다고 근황을 전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론보다 사람다운 예의와 품성을 심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구체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안내해주는 것도 괜찮겠다고 했다.

내가 아는 친지 중의 한 사람은 설날, 아이들이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그냥 주지 않는다. 세뱃돈 받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그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올해 무엇을 할 건지, 확실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물어보았다. 아이들은 얼른 세뱃돈을 받고 후다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고 싶은데, 이 무슨 질문인가 싶어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그들은 어찌할 줄 몰라 몸을 비틀고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당시 학교에 있다는 나조차 내 죄인양 당황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이들에게 20년 뒤의 자화상을 그려보라고 하면 그들의 몇은 명품을 걸친 성형미인을 그려놓거나, 자신 옆에 금화가 터져나올듯한 돈주머니를 그려놓고 흐뭇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면 그 작품과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이게 아닌데’ 하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던 기억이 있다.

상점에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 진열되어 있지만, 문을 나서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들이 더 많이 있다. 믿음, 인간애, 베풂, 나눔, 봉사 등. 가격으로 매길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물질의 삶 속에 갇혀 잊고 지낸다. 우리는 지금 저마다의 시장에서 희망을, 각자의 꿈을 아무렇지도 않게 화폐단위로 치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알지 못하는 사람의 영혼을 이해하려면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보지 말라고 했다. 그가 무엇을 열망하는지, 그가 어떤 구심점을 향해 가는지를 눈여겨보라고 했다. 후배들에게 돈이 되는 것이 아닌, 희망이 되는 것, 혼을 바쳐 열망하는 것들을 찾아보라고, 그래서 지난한 노력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질 꿈, 오랜 기다림을 필요로 하는 꿈들을 찾게 할 것이다.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정상을 바라보며 포효하는 표범처럼 수없이 저지르고 실패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할테다.

겨울나무에 얼음꽃이 피면 친구는 다시 ‘태백준령에 빙화가 피었어!’하며 정겨운 목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잎새 하나 없는 겨울나무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봄을 기다리듯 나도 이 겨울, 꿈을 길어 올릴 두레박 하나 마련할까 싶다.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