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영성의 길

입력 2011-01-11 17:33


(27) 영적 성장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자란다. 자라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모든 생명은 지름이 25만분의 1인치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세포로부터 시작한다. 세포의 중심에는 DNA, 유전인자가 있다. 유전인자는 세포의 핵심부에 위치하며 생명의 원리와 동력을 제공한다. 기독인은 하나님의 생명의 유전인자를 받았다. 베드로는 그것을 ‘썩지 않는 씨’(벧전 1:23)라고 불렀다.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 안에 생명의 씨가 있다. 어떤 신학자가 생명의 DNA를 Divine Nature of the Almighty(전능자의 신적인 본성)라고 해석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신적 생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한 일인가? 문제는 이 생명이 자란다는 것이다. 성장의 원리는 자생적 시스템의 원리이다. 모든 생명은 생존 조건에 부합되기만 하면 스스로 자란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으면 스스로 자란다(요 15:4). 줄기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스스로 자란다(막 4:26∼27).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생명도 스스로 자란다. 그 생명이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 스스로 자란다. 예수님의 생명의 줄기에 붙어 있는 한 스스로 자란다. 자라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진액이다.

그러나 스스로 자란다고 우리의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초자연적인 벼락이 쳐서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초인적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구원은 공짜지만 성숙에는 대가가 따른다. 교회사의 많은 선배들은 영적 성장을 믿었다. 그들에게 영적 성장이란 마치 평생에 걸쳐 올라가는 등산과 같았다. 니사의 그레고리의 ‘모세의 생애’, 요한 클리마쿠스의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아빌라의 테레사의 ‘영혼의 성’, 십자가의 요한의 ‘갈멜산 등정’ 등이 모두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영적 성숙이 사다리를 오르는 것과 같다면 누구도 단번에 사다리를 오를 수 없다. 많은 사람이 구원에 실패하는 것은 구원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 수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 크리마쿠스가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쾌락으로 빚어지듯이 그리스도인은 영성으로 빚어진다”고 말했다.

영성의 핵심은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이요, 영적 성장의 핵심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예수님 닮는 노력이다. 율법주의와 편의주의는 진정한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두 개의 큰 적이다. 율법주의에는 은혜가 없고 편의주의에는 책임이 없다. 책임과 은혜는 영적 성장을 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다. 은혜 없이 생명이 들어오지 않고 책임 없이 생명이 자라지 않는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은 앞에서 은혜의 주인이 끌고 뒤에서 책임의 하인이 미는 수레를 타고 언덕을 오른다. 영적 성장은 ‘그로부터’(엡 4:16) 시작되어 ‘그에게까지’(엡 4:15) 자란다. 영적 성장은 ‘범사에’(in everything)(엡 4:15) 조화와 균형을 통해 이루어진다. 안으로 예수님의 성품으로 자라고, 위로 예수님의 거룩으로 자라고, 밖으로 예수님의 긍휼로 자란다. 모든 성장은 은혜로 시작하여 훈련을 통해 자란다. 영적 성장은 가능하며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평생 이 영광스러운 목표를 바라보고 산다.

이윤재 목사(한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