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박강섭] 수문장 교대식 유감
입력 2011-01-10 17:37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젊은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조각한 갈라테이아를 사랑했다. 이유는 현실 속의 어떤 여성도 갈라테이아보다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컴퓨터 게임에 몰입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가상현실이 현실세계보다 더 짜릿하고 사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평소 TV를 잘 보지 않는 필자는 우연히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프로를 보고 진짜로 착각했다. 등장하는 연예인 커플의 연기와 상황 설정이 진짜 부부보다 더 리얼했기 때문이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프로레슬링도 마찬가지다. 사각의 링 안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프로레슬링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경기에 몰입된 탓에 진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연출에 의해 조작된 감동은 더 이상 감동이 아니었다.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과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서울시가 주관하는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1996년에 첫선을 보였다. 문화재청의 위탁을 받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주관하는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은 2002년부터 시작됐다. 최근에는 공주를 비롯한 지방도시에서도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고 있다. 모두 영국의 버킹엄궁 근위병 교대식을 모델로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의 인기는 대단하다. 구군복을 입고 환도를 찬 수문장을 비롯해 군사와 취타대의 화려한 전통의상과 절도 있는 교대식은 관광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특히 유럽의 근위병 교대식을 기억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은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고궁에서 만나는 조선시대 복장의 군사들에 열광한다. 국내 관광업체들이 앞다퉈 외국인 관광객들을 덕수궁 앞 서울광장으로 끌고 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왕궁의 근위병 교대식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상품으로 인기가 높다. 검은색 털모자와 붉은 제복 차림의 영국 버킹엄궁 근위병 교대의식은 대영제국의 상징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무표정한 장난감 인형처럼 보이는 근위병이 모두 영국의 정규군인이라는 것. 특히 근위기병대는 영국군에서 가장 오래 되고 서열 높은 부대로 유명하다.
바티칸 교황청의 근위병도 인기가 대단하다. 노란색과 보라색 줄무늬가 인상적인 제복은 1548년에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 교황청 근위병은 1505년부터 줄곧 스위스 용병이 맡아왔다.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용병사령관을 포함한 147명이 죽음으로써 교황을 지켜 용맹성과 충성심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교황청 근위병은 출신지역, 키, 나이, 언어 등을 가려 엄격하게 뽑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덕수궁 앞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재연하는 장수와 군졸들은 2006년까지 공익근무요원이었다. 공익근무요원들이 귀고리나 목걸이 등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집안일을 핑계로 예사로 결근하는 등 말썽이 일자 2007년부터 비정규직 근로자인 이벤트 회사 직원들에게 수문장 교대식을 맡기고 있는 실정이다.
무릇 국가를 대표하는 관광상품이 되려면 역사성과 함께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국방부에 삼군의장대와 여군의장대 외에 전통의장대가 있다. 검도 등 전통무술 유단자들이 전통 복장을 입고 근무하는 국방부 전통의장대는 G20 정상회의처럼 국빈 방문 때 사열식을 하는 부대로 버킹엄궁이나 교황청의 근위병 못지않게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차제에 국방부 전통의장대를 확대해 덕수궁과 경복궁의 수문장 교대식을 맡기면 어떨까. 대한민국의 진짜 군인이 수문장 교대식을 한다면 국가의 정체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