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수지 (12) 모교서 강의하다 하와이 간호조무사로

입력 2011-01-10 21:31


결혼 후 시어머니 병 수발을 하면서 서울외국인학교 양호교사로 근무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일을 그만두라고 해서 방학과 동시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집에서 살림하면서 예쁘게 단장하고 다소곳이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를 원했다.



한없이 답답하게 3개월을 지내고 있던 8월 중순쯤 남편이 내게 새 학기부터 다시 학교에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어린애처럼 머리가 천장에 닿도록 펄쩍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낮은 천장이 찢어져 쥐똥이 우르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래도 너무나 행복했다. 나중에 남편에게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냐고 물었더니 지난 3개월 동안 내가 너무 불행해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저 여자를 집에만 두었다가는 평생 불행하겠구나.’

2년 동안 지속된 서울외국인학교 양호교사 일은 흥미롭고 유익했다. 체육시간에 나가 아이들과 운동도 하고 이 닦는 법, 손 씻는 법 등 기본적인 개인위생을 가르쳤다. 또 학생과 교사들의 건강을 관리하고 보건교육도 실시했다. 병원은 아픈 환자를 돌보지만 양호교사는 예방과 치료와 재활을 포함해 폭넓은 간호를 할 수 있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어느 날, 내게 장학금을 주던 미국의 머츠(Mertz) 재단으로부터 한미재단을 통해 장학금을 보내줄 테니 한국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공부해도 좋다는 놀라운 소식을 받았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화여대 정신과 간호학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석사과정을 마친 1968년 9월, 내가 이화여대 전임강사가 되던 해에 남편은 이화여대와 같은 재단에 속한 국제대학 경영학과 야간부에 편입했다. 당시 극동방송국에 다니던 남편은 외국 출장이 잦았다. 그러면 내가 남편 대신 수업을 듣고 노트 필기까지 해줬다. 그때 이화여대 교수들이 국제대학에 와서 강의를 하다가 강의실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는 “웬일이냐”고 묻기도 했다.

남편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인 1970년 12월 미국 정부의 동서문화센터 장학생 선발시험에 기적적으로 합격해 하와이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할 수 있게 됐다. 생활비까지 모두 대주는 조건이었다. 그 다음해 7월 남편은 배를 타고 먼저 떠났고, 나는 6개월 후에 이화여대에 휴직계를 낸 뒤 두 아이들을 데리고 하와이 호놀룰루로 갔다.

남편이 공부하는 동안 병원에서 일하고자 했지만, 미국 간호사 자격증이 없는 나를 채용하는 병원은 없었다. 나는 이곳저곳을 수소문한 끝에 마우날라니 회복 병원에 간호조무사로 취직했다. 장기 환자, 특히 노인 환자가 많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돌아가신 곳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날 무렵 ‘미세스 콕’이라는 간호부장이 내게 보여줄 방이 있다면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여기가 당신 나라의 대통령이 계셨던 방입니다.”

그녀는 3층의 근사한 방을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 계시는 노인분들 역시 훌륭한 일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당신네 나라의 대통령처럼 소중한 분들이지요.”

사실 첫 3일 동안 업무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면서 ‘내가 이곳에서 왜 간호조무사로 근무해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들기도 했지만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 여기 있는 환자들이 나름대로 모두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게 됐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