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재희] 겨울 산책이 주는 기쁨

입력 2011-01-09 19:20


오랜만에 집 가까이 있는 갑천으로 산책을 나간다. 주민들이 새벽이나 낮, 심지어 늦은 밤에도 걷고 뛰고, 또 자전거를 타면서 즐기는 곳이다. 갑천변은 도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내가 흐르고, 다양한 동식물들이 살고 있어 산책길로 내려오는 계단은 눈과 얼음이 엉겨 붙어 미끄럽다. 조심조심 한걸음씩 힘을 주어 발을 내딛는다. 며칠 계속해서 눈이 내리더니 갑천 주변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였다. 두툼한 파카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빠르게 걸어간다. 부부인 듯 마스크를 쓴 두 사람도 걷고 있다. 그러나 그 많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는지 겨울의 갑천변은 쓸쓸하다.

갑천의 물은 그동안의 추위로 얼어붙었다. 오후가 되면 흔들리는 물 위로 비치는 햇살이 아름다웠는데, 오늘은 해조차 얼어붙었나 보다. 철따라 제 빛을 자랑하던 풀들도 누렇게 엉클어진 채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얕은 물가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검고 둥그런 돌들이 징그럽게 박혀 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예사 돌들이 아니다. 갑천이 정비된 후, 겨울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더니 먼 곳에서 날아온 듯한 오리들이 한컷 몸을 웅크리고 있다. 이들도 겨울 추위를 견디기 힘든가보다. 고고하게 노닐던 백로도, 나무 덤불 속에 모여 있던 참새들도 흔적이 없다. 이 부근에서 물고기를 잡던 아저씨가 계셨는데, 군데군데 낚시를 드리우고 물고기를 잡던 강태공들도 추위에 자취를 감추었고, 가끔 퍼덕이며 뛰놀던 물고기들도 물속으로 숨어들어 조용하다. 이 조용함이 낯설지만 그리 싫지는 않다.

반듯하게 잘 다듬어진 징검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향한다. 한동안 걸어가니 저편과는 사뭇 다른 겨울의 활기가 느껴진다. 어설프게 쳐놓은 울타리 안에 아이와 아빠들이 썰매를 타며 놀고 있다. 아이들의 환호소리가 즐겁고 상쾌하다. 조그만 의자에 쇳날을 달아 두 딸을 앉히고 밀어주는 아빠가 보인다. 이미 지쳤는지 털퍼덕 썰매에 앉아 아이에게 끌어 달라고 끈을 내미는 아빠도 있다. 함께하는 썰매놀이는 훈훈하고 정겹다. 나는 어느덧 그 옛날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 주셨던 썰매와 행복했던 얼음지치기가 떠올랐다. 신나게 얼음을 지치다 보면 어느새 등 뒤로 땀이 흘러내리곤 했었지. 지금 내가 그때의 일을 추억하듯 아이들도 언젠가 아빠와의 즐거웠던 휴일을 기억할 것이다.

겨울 산책길은 쓸쓸하다. 그러나 이 쓸쓸함 속에서 나는 오롯이 나와 만나 사귄다. 겨울의 황량함속에 따뜻함과 푸르름이 감추어 있듯, 나와의 사귐도 아프지만 따뜻하고 푸르다. 낯설고 힘겨웠던 나와의 만남이 이제는 사뭇 정겹고 편안하다. 나는 나와 사귀는 쓸쓸한 이 시간이 행복하다. 겨울산책에는 또한 뜻밖의 만남이 있어 행복하다. 환호하는 아이와 행복한 아빠, 그리고 덩달아 즐거운 나. 산책길에 만난 뜻밖의 기쁨은 어느덧 따뜻한 기억이 되어 한동안 내 마음을 훈훈하게 덥혀 줄 것이다. 내가 겨울산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쓸쓸함과 훈훈함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김재희 심리상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