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의 필치 화폭 가득 ‘한국 서정’… ‘장욱진 20주기 회고전’
입력 2011-01-09 17:33
“나는 심플하다. 이 말은 내가 항상 되풀이 내세우고 있는 나의 단골말 가운데 하나지만 또 한번 이 말을 큰 소리로 외쳐보고 싶다.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 화단을 대표하는 장욱진(1917∼90)은 육십 평생 그림에 모든 것을 걸었다. 충남 연기에서 태어난 그는 소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고교 때까지 전국 학생미술상을 휩쓸었다. 일제강점기에 도쿄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그는 해방직후 국립박물관과 54∼60년 서울대 미대 교수로 봉직한 외에는 줄곧 한적한 시골에서 작업에 전념했다.
그의 작품은 작은 캔버스 안에 간결한 묘사와 밀도 높은 균형감으로 한국적인 서정을 가득 안겨준다. 나무와 아이, 새와 소, 가족 등을 소재로 유희적인 감정과 풍류적인 심성을 표출했다. 기법 면에서는 동양화와 서양화를 넘나들며 전통을 현대에 접목시켜 조형적인 독창성을 구축했다는 평가다.
고고미술사학자인 최순우는 “그는 세움을 모르고 세상을 살아 왔고, 또 세움을 모르고 그림을 그려온 사람이다. 여기서 세움이란 명리과 생명과 돈, 덕을 모두 아우른 뜻이지만 그는 정말 거기에 곁눈질을 할 줄도 모르고 세상을 지나왔음이 분명하다”고 평했다.
작업에 엄격하면서도 순수와 동심을 잃지 않았던 장욱진의 20주기를 맞아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14일부터 2월 27일까지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소’(1953) ‘반월’(1988) 등 미공개작과 ‘자화상’(1951) ‘나무와 새’(1957) ‘가로수’(1978) 등 주옥같은 대표작, 그리고 먹그림 등 70여점을 선보인다. 평소 접하기 어려운 이번 출품작은 박명자 갤러리 현대 회장이 개인 소장자를 설득한 끝에 모을 수 있었다.
전시는 향토성이 짙은 초기(1937∼62), 정체성을 모색한 경기 덕소 작업실 시대(1963∼75), 정통회화의 경향이 나타난 서울 명륜동 작업실 시대(1975∼79), 수묵화의 절정기인 충북 수안보 작업실 시대(1980∼85), 종합화의 경지를 이룬 경기 용인 작업실 시대(1986∼90) 등으로 구성됐다. 전시장에는 용인 아틀리에에서 사용하던 화구 및 가구 등을 그대로 옮겨와 재현하고 영문 화집(마로니에북스)도 출간됐다.
천진난만하고 안빈낙도하는 생활을 즐긴 장 화백은 역사학자 이병도의 사위이자 이건무 문화재청장의 고모부다. 장 화백의 큰딸 경수씨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 외에는 술을 마시는 게 휴식이었던 아버지는 툭하면 ‘너는 뭐냐 나는 뭐냐’라고 묻곤 하셨다”면서 “박사집안인 외가와는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고독한 작업 중에서도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있었다”고 전했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버릴 작정이다. 옛말이지만 고생을 사서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꼭 들어맞는다. 난 절대로 몸에 좋다는 일은 안한다. 평생 자기 몸 돌보다간 아무 일도 못한다.”
부인과 1남4녀 등 가족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많이 남긴 장 화백은 90년 12월 27일 숨지기 전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텅 빈 흰 집과 하늘을 나는 자화상을 그린 말년작 ‘밤과 노인’이 애잔하게 다가온다(02-2287-350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