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50) 조선 중기 문신 윤훤 초상화
입력 2011-01-09 17:34
조선 중기 문신 윤훤(1573∼1627)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의 넷째 아들로 본관은 해평(海平)이요 호는 흰 모래처럼 맑고 깨끗하게 산다는 뜻으로 백사(白沙)라고 지었습니다. 1590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97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사관(史官)이 되었답니다. 1599년 호조좌랑을 거친 그는 1605년 동래부사로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했지요.
1611년에는 황해도 관찰사가 됐으나 이듬해 대북세력을 제거하려 했다는 죄명으로 압송되는 김직재를 후대했다는 이유로 관직을 삭탈당합니다. 이후 복관돼 1617년 경상도 관찰사에 오른 그는 1625년 평안도 관찰사까지 역임할 정도로 관운이 트였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1627년 병자호란 때 평양에서 적과 싸우려 했으나 병력과 장비 부족으로 후퇴하고 말았답니다.
이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지자 의금부에 투옥돼 강화도에서 효수형에 처해진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지요. 아버지를 이어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그의 형 윤방을 비롯해 조카 신지의 아내이자 인조의 고모인 정혜옹주가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그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답니다. 백사 윤훤은 숨졌지만 그의 초상화는 자손대대로 보전돼 왔습니다.
영정의 바닥에는 밑그림을 긋고 각종 문양이 새겨진 채전(彩氈)을 깔았으며 초상화 주인공이 교의(交椅·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 좌상으로, 실물이 별로 없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공신상(功臣像) 가운데 하나랍니다. 그린 이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영정의 품격으로 보아 임금이 도화서 화원에게 직접 명하여 제작한 것이 분명합니다.
머리에는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의 관모인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녹색 비단으로 만든 녹단령(綠團領)을 입었으며 가슴에는 학이 그려진 학정대(鶴頂帶)와 기러기가 새겨진 운안(雲雁) 흉배를 달고 있는 모습입니다. 얼굴은 약간 오른쪽으로 돌리고 손은 앞으로 모은 채 발은 족대 위에 팔자(八字)로 벌리고 있지요. 이는 2품에 해당하는 복식으로 조선 중기 초상화 연구에 귀중한 유물이랍니다.
윤씨 가운데 파평(坡平)윤씨도 마찬가지겠지만 해평윤씨는 조선 중기 이래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명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영의정을 지낸 윤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한 윤근수 형제가 가문의 영광을 이끌었고 윤두서의 네 아들도 모두 높은 관직에 올랐답니다. 구한말에 들어와서는 순조의 장인인 윤택영이 이름을 높였고, 현대에 들어서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이 가문 출신이지요.
윤훤의 15대 종손 윤홍원씨가 최근 ‘백사공 윤훤 초상화’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로 유명한 경기도 파주 장단의 북한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 온 해평윤씨 문중의 소중한 유산으로 6·25전쟁 때 월남하면서 가져왔다는군요. 백사가 숨진 지 384년 만에 공개되는 초상화는 영욕의 삶에 대한 명예회복이자 관람객들과 영원히 살아 숨쉰다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하겠습니다.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