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한 詩읽기 끝엔 사유의 즐거움이… 조연호 장시집 ‘농경시’

입력 2011-01-07 17:48


난해하다. 비문이 난무한다. 이걸 어떻게 통독해야 할지, 난감하다.

시인 조연호(41)가 새해 벽두에 일을 저질렀다. 장시집 ‘농경시’(문예중앙)가 그것이다. 제목만 보면 서정성 가득한 쟁기질꾼의 땀방울이 연상된다. ‘농경시’라는 제목이 지난해 출간된 그의 시집 ‘천문’과 댓구를 이룬다는 것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도입부부터 꽉 막힌다.

“겨울, 꿈에게 다짐한다. 밤의 모호한 흔들림에 맺힌 핏방울처럼, 떠오르는 별로부터도 검게 윤이 나도록 너희는 배회로 허공을 치장하고 있었다. 내 작은 껍질을 자르기 위해 어버이는 물 양동이 하나 가득 아름다운 선율을 가져왔다. 가라앉은 부유물의 맛이라고 쓴 단력의 식후감은 매번 물통에 목마름을 쏟아부은 사람의 것이었다.”(9쪽)

이게 무슨 말인가. 문학평론가 허윤진이 쓴 해설을 곁눈질한다. ‘1’이라고 번호 매겨진 이 도입부는 농경족 남자 아이의 할례를 그리고 있다고 적혀 있다. 비자발적으로 할례를 받은 아이가 신성한 계약의 표상인 작은 살껍질을 끝까지 손에 쥐고 있다는 뜻이란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할례라는 단어에서 기독교적 출생의 제의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도입부를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시 해설을 펼쳐본다. 축약하면 이렇다. 태어나면서 떨어져나간 살점은 그 자체로 지상에 난파된 생명체의 비극을 함축하는데 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농사로 환치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렵다. 장편소설에 버금가는 2만여 단어로 이루어진 시집. 게다가 49개의 일련번호를 붙여 모두 174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연체 문장으로 씌어진 시집은 낯선 어휘들이 난무하고 의미의 상식적인 연결을 방해하는 난해성으로 점철된다. 시집은 거대한 미로와도 같다.

본인의 말을 들어보자. 지난해 말 복간된 문예지 ‘문예중앙’에 인터뷰가 실려 있다. “시가 의미와 정보 전달의 목적이 아닌 이상, 오히려 더 중층적인 의미망을 형성하는 데 적합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길고 복잡한 문장을 고집했지요.” 감성에 의존해 시를 쓰는 방식에서 탈피해 논리나 사유의 방식으로 시를 쓰겠다는 의도였다는 말이다.

“문학 안에 감성의 미가 있다면 사유의 미도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점과 함께 감각적인 표현이 있다면 사유의 감각성 역시 문학 안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했기에 이전의 텍스트들과는 이질적인 면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농경시’를 이전의 변형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감각성으로, 그 자체 한 계열로 이해해달라는 주문이다.

이런 류의 텍스트가 우리 문학에 없지 않았다. ‘죽음의 한 연구’를 필두로 ‘소설법’ ‘잡설품’ 등의 저작을 쏟아낸 소설가 박상륭 역시 만연체 문장에 우주적 사유와 생로병사의 질곡을 담아냈었다. 그렇다면 조연호는 이 난수표 같은 시집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신의 동산에서 쫒겨나 인간이 처음 한 일은 물론 농경이겠지요. 씨를 뿌리고 이제는 스스로 따먹을 수 있는, 먹어도 벌 받지 않는 과일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가 이미 죄를 내포하고 있어서 그 열매와 곡식은 항구적으로 질병적일 수밖에 없지요.”

할례에 깃든 임상적인 측면, 말하자면 인간 존재 자체가 질병이라는 원죄 의식의 확장이 ‘농경시’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사족. 조연호 자신은 이 시집을 계기로 시인에서 구도자 쪽으로 이미지가 급격히 기울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떠리. 독자들은 난독의 고통을 감수하기만 하면 조연호의 지적 농경술이 빚어낸 사유의 유희를 즐길 수 있으니 이 시집이 우리 문학의 풍성함에 기여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빛은 행각(行脚)한다. 축복인 신음인 채로 나는 태어났다. 그리고 대개의 하루는 분변(糞便) 속에서 발견되곤 했다. 자정에 치켜떴던 나의 눈을 정오가 감겨줄 것이다. 자정의 싹에서 침이 멈추지 않는다.”(191쪽)

아무쪼록 이 종장에 이르기까지 시집을 내팽개치지 않기를.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