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협중앙회 안전조업상황실 ‘24시’… 그들은 잠실서 바다를 지킨다

입력 2011-01-06 17:50


지난해 2월 19일 오전 11시53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북위 37도 40분 24초, 동경 130도 19분 30초 해역에서 잠수함 발견. 수면 위로 잠망경 올린 채 북쪽으로 항해 중입니다.”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통화 내용을 받아 적었다. 합동참모본부, 국가정보원, 공군 전구항공통제본부, 해양경찰청, 해군, 농림수산식품부와 연결된 핫라인을 통해 내용이 보고됐다. 곧이어 “훈련 중인 아군 잠수함”이란 식별 결과가 나왔다. 상황이 종료되는 데 채 6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곳은 서울 잠실(송파구 신천동) 수협중앙회 본부다.

365일 잠들지 않는 곳

수협중앙회 본부엔 특별한 상황실이 있다. 동해 서해 남해 바다에 나가 있는 어선들과 통신하는 어업정보통신본부 안전조업상황실. 어선들에 어황 정보, 날씨 등을 알려주고 어선들로부터 위치와 어획량을 보고 받는다. 이를 위해 인천 속초 주문진 등 전국 16곳에 통신국을 두고 있다.

지난 3일 찾은 상황실 모니터엔 어선들의 현재 위치가 빼곡히 표시돼 있었다. 어선들은 하루 1∼3번 전국 16개 통신국에 위치와 어획량을 보고한다. 각 통신국이 보고받은 내용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이 상황실 모니터에 어선 위치와 관련 정보가 표시된다.

모니터는 어선들을 국적에 따라, 고기잡이 방식에 따라 분류해 보여준다. 이날 우리 어선은 서해에 437척, 동해에 736척, 남해와 제주 근해에 1296척 등 모두 2469척이 조업 중이었고, 중국 어선 243척이 우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들어와 있었다. 일본이나 중국 EEZ 부근에 있는 우리 어선은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자칫 조업 규정을 위반했다가 나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이상식(35)씨가 제주통신국에 전화로 알렸다. “대마도 동남쪽 15해리 해역에 있는 연승어선이요. 조업금지구역 경계선상이니까 이동하도록 선장님께 말씀해주세요.”

바다에는 우리 측 EEZ, 일본 EEZ, 중국 EEZ, 러시아 EEZ, 한·일 중간수역, 한·중 잠정조치수역, 특정금지구역 등 다양한 공간이 존재한다. 구역마다 지켜야 할 규정도 다르다.

“최근 일본 영해 경계선에서 조업하던 우리 배가 일본에 나포된 적이 있어요. 우리 측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 상으론 이상이 없었는데 일본은 영해를 침범했다고 주장하더군요. 이런 분쟁을 막기 위해 실시간으로 모니터하는 겁니다.”

6명이 교대로 24시간 365일 근무하는 상황실이 모니터링 업무만 하는 건 아니다. 보고 받은 어획량을 근거로 통계도 만든다. 해상 재난사고가 일어나면 제일 먼저 파악하는 곳도 여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별한 임무가 있다.

잠수함 잡는 어선들

지난해 2월 19일 오전 11시53분, 제주에서 출항해 울릉도 북서쪽 해역까지 진출한 복어잡이 어선 307대봉호 선장 눈에 낯선 풍경이 들어왔다. 멀지 않은 수면 위로 철기둥 모양의 구조물이 삐죽 올라와 있었다. 게다가 북쪽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잠수함이라고 직감한 선장은 즉시 속초통신국에 무전을 보냈고 속초통신국은 바로 서울 상황실로 보고했다.

어선 긴급보고 제도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이디어다. 박 전 대통령이 수협을 방문해 통신제도 설명을 듣다가 “바다에 나가 있는 어선들을 활용해 간첩선이나 적 잠수함 동향을 살피면 어떤가”라고 제안해 만들어졌다. 1969년 5월 시행됐고 이때부터 어선들은 정체불명의 선박이나 잠수함을 보면 ‘긴급보고’를 하도록 교육받고 있다.

지난해 이렇게 접수된 긴급보고는 42건. 2007년 18건, 2008년 22건, 2009년 27건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지난해 42건 중 31건이 잠수함이다. 모두 아군 잠수함이었다. 11월엔 제주 부산 통영 등지에서 잠수함이 6건이나 보고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해군은 잠수함을 10여척 보유하고 있다. 신고 정신이 갑자기 투철해진 게 아니라면 잠수함 활동이 그만큼 활발해졌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어선들은 잠수함을 곧잘 잡아낸다. 지난해 3월 강원도 고성 앞바다에서 북한 선박을 발견해 신고했던 신대용(59) 선장은 “물고기를 찾는 데 사용하는 어군탐지기가 반경 1㎞, 깊이 1.4㎞를 탐색한다. 잠수함은 물고기보다 훨씬 커서 알아보기가 어렵지 않다”고 설명했다.

육안으로 잠수함을 발견해 보고하는 경우도 많다. 잠수함은 원자력을 이용한 핵 잠수함과 디젤기관을 가진 재래식 잠수함이 있고, 한국 해군 잠수함은 재래식이다.

재래식 잠수함이 디젤엔진을 돌리려면 산소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 스노클이라고 불리는 빨대 같은 것을 수면 위로 띄워 공기를 흡입한다. 그때 디젤엔진을 가동시켜 축전지를 충전한 뒤 수중에서는 축전지의 힘으로만 항해한다. 스노클이 수면 위로 노출될 때 어부들에게 발각되곤 한다.

김용균 정보통신운영팀장은 “2002년 출근해보니 제주 앞바다에서 잠수함 관측보고가 들어와 있었다. 이후 포항, 울진, 주문진 앞바다에서 3∼4시간 간격으로 계속 잠수함 관측 보고가 들어왔다. 제주에서 발견된 잠수함의 이동 경로를 어선들이 고스란히 잡아낸 거였다. 어부들의 능력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어부들의 긴급보고는 실제 간첩선을 잡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1998년 6월 22일 꽁치잡이 어선 동일호는 강원도 속초 근해에서 북한 잠수함을 발견해 신고했다. 인근에 있던 용신호도 40분 뒤 같은 내용을 보고해 왔다. 당시 잠수함 인양 작업을 총괄한 조부근 해군 제1전투단장은 “우리나라 영해에 떠 있는 어선들이 모두 이렇게 해준다면 우리 해군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며 감격해 했다.

1996년 잠수함을 타고 강릉에 침투했던 간첩 이광수는 “북한이 잠수함을 이용해 수중 침투를 시도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게 남한 어선”이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수협은 지난해부터 어민들의 신고를 장려하기 위해 포상을 시작했다. 북한 어선을 신고한 수일호 신대용 선장이 첫번째 대상자였다. 부상은 5만원 상당의 망원경. 더 잘 관측해 달라는 뜻이다.

EEZ의 숨은 수호자

3일 상황실 모니터에 서해의 중국 국적 배만 따로 띄우자 한·중 잠정조치수역과 한국 영해 사이 해역인 한국 측 EEZ에 중국 배들이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게 한눈에 드러났다.

양국 어선이 자유롭게 고기잡이를 하는 잠정조치수역과 달리 EEZ 조업은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상황실에선 중국 배들이 영해를 침범하는지, 허가받지 않은 업종의 배가 한국 측 EEZ에 들어오는지 살피고 있었다. 올해 한국 측 EEZ에 들어올 수 있는 중국 어선은 1700척, 어획 할당량은 6만5000t이다. 몇 척이 들어와 몇 t의 고기를 잡았는지 정확히 계산하는 것도 수협의 몫이다.

지난달 서해에서 해경과 중국 어선의 충돌 사고가 발생한 뒤로 상황실은 서해 EEZ 관리에 촉각이 곤두서 있다. EEZ에 들어와 조업하려면 12시간 전 상대국에 허가번호, 입역시간, 입역경로 등을 보고해야 한다. 들어온 뒤로도 매일 낮 12시에 있었던 위치를 24시간 안에 어획량과 함께 상대국에 알려야 한다

이렇게 확보된 정보들은 이곳 상황실로 모였다가 해경과 농식품부 산하 어업지도사무소로 전파돼 불법조업 단속 자료로 활용된다. 서해어업지도사무소 관계자는 “어선은 그물을 끌고 계속 움직이니까 수협 정보가 아무리 정확해도 실제 위치와 차이는 있다. 하지만 어디쯤에서 조업 중인지 아는 것만도 큰 도움이 된다. 거리를 좁힌 뒤 레이더로 정확한 현재 위치를 추적하면 된다”고 말했다.

최근 해경 함정을 들이받고 침몰한 중국 배 랴오잉위 35403호(63t급)도 지난해 12월 10일 오후 8시 우리 측 EEZ에 들어와 조업하겠다고 알려왔었다. 35403호는 EEZ에 머물면서 매일 어획량도 보고했다. 11일부터 조업을 시작했는데 17일 참조기 500㎏을 잡은 게 전부라고 했다. 군산해경은 이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검문을 시도했었다.

통상 어선을 발견하면 승선해 협정 위반 내용이 있는지 살핀다. 배에 있는 조업일지와 수협에 보고된 어획량이 일치하는지, 창고에 있는 실제 어획량이 보고된 어획량을 초과하지 않는지 조사한다. 오차가 있으면 나포한다. 하지만 배가 침몰하면서 어획량을 속였는지 따질 수 없게 됐다.

현재 수협 어업정보통신본부에 주기적으로 보고하는 우리 어선은 1만270척이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 평균 4000척 정도가 바다에 나가 조업을 한다. 바다 구석구석 촘촘히 박혀 있는 셈이다.

“바다는 어부가 제일 잘 알죠. 천안함 잔해를 발견한 것도 어부였고, 어뢰 파편을 건져 올린 것도 어부였어요. 긴급보고 제도는 우리나라에만 있습니다. 북한이 어선들 쉬는 기간을 노려 침투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예요.”(안전조업상황실 김용균 팀장)

천안함부터 중국 어선까지, 2010년 한국을 뒤흔든 일들은 바다에서 벌어졌다. 어선들은 그 바다에 흩뿌려진 촘촘한 신경망이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