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No, 쇼핑 Yes”… 사고 먹는 한국
입력 2011-01-06 17:53
외국 관광객 1000만명 시대 눈앞… 그들에게 한국이란
지난 5일 오후 서울 명동에서 종이가방을 양손에 든 홍콩 관광객 네 명을 만났다. 한국산 모이스처라이저와 마스크팩, 비비크림, 개별 포장된 김, 스낵. 가방에는 거리 쇼핑에서 건진 물건이 가득했다. 하루 전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벌써 도심 백화점과 면세점, 명동 쇼핑가를 섭렵했다. 다음 이동장소는 동대문 패션타운이라고 했다.
이틀을 더 머물 거라는 그들에게 조선 궁궐이나 인사동에 들를 계획인지 물었다. 남자 셋, 여자 하나. 20대 후반 홍콩 친구 넷이 합창하듯 까르르 웃어댔다. “노, 노, 온리 쇼핑 이팅(No, only shopping eating). 노 인터레스트 코리아 히스토리(No interest Korea history).” 쇼핑하고 음식을 즐기러 왔을 뿐, 한국 역사나 전통문화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인 듯했다.
중국 지린성에서 온 웨이 란도 한국 방문의 이유를 묻자 옷가지들로 불룩한 예닐곱 개의 비닐봉투를 들어보였다. 역시 명동에서 산 중저가 의류들이다.
일본에서 온 사사노 사키 부부와 대만 관광객 자키 창 부부, 친구들과 함께 한국에 놀러왔다는 태국 출신 킷나타팟의 대답도 엇비슷했다. 한국 연예인 덕에 “(한국에) 호감을 갖게 됐다”거나 적어도 “궁금해졌다”는 이들은 서울 주변을 맴돌며, 화장품과 옷 인삼 김 같은 걸 사들고, 김치 불고기 비빔밥 돼지갈비 삼계탕을 먹다가, 3∼4일 후쯤 고국에 돌아갈 것이다.
그들은 사러 온다
“중국인들이 한국에 산이나 풍경을 보러 오지는 않죠. 문화유산이나 유적도, 글쎄요, 별다른 반응은 없다고 봐야죠. 한국 가면 경복궁 정도는 봐야 한다고들 하니까 보긴 하는데 ‘별로다’ 그러는 사람도 많아요 서울 하면 역시 쇼핑이죠. 없어 못살까 걱정이지,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 못 봤어요.”(모수범 화방관광 가이드실장)
“중국 관광객 사이에 (고궁 관광에 대해) 콧방귀 뀌는 분위기가 있긴 해요. ‘경복궁이 자금성과 비교해서 어떻다’는 둥 그런 거죠. 처음에는 언쟁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대처법을 익혔어요. 한국 관광에서 만족도가 높은 건 단연 쇼핑이에요. 가격 대비 물건이 좋으니까. 중국인 사이에서 한국산은 가짜가 없다, 이런 인식이 퍼져서 이미지가 아주 좋아졌어요.”(중국인 전문 가이드 왕기희씨)
진종화 한국관광공사 중국팀 과장은 “전통문화 및 역사 관광에 대한 만족도가 높지 않다”는 데 동의했다. 한국 관광의 경쟁력으로는 쇼핑이 첫손가락에 꼽혔다. 증거는 많았다.
관광공사의 ‘2009 외래 관광객 실태조사’를 보면 외국 관광객들이 한국에 올 때 고려하는 요인은 쇼핑(56.5%, 이하 중복답변)이 1위였다. 산과 바다, 강 같은 자연풍경 감상(22%)이나 고궁 성곽 박물관 등 역사문화유적(20.8%)보다 배 이상 높은 수치다. 한국에 와서 하는 일도 대부분 쇼핑(62.5%)이었다. 관광의 본류인 ‘구경’(관광지 방문·50.4%)은 두 번째로 밀렸다. 홍콩,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관광객일수록 쇼핑 편애는 심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는? 한국인이라면 조선 정궁인 경복궁이나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 종묘, 전통문화거리 인사동을 꼽겠지만, 틀렸다. 외국인들은 ‘한국 여행 중 인상 깊었던 여행지’ 1위로 명동(27.7%)을 내놓았다. 역시 쇼핑 때문이다.
중국인 전문 화방관광의 이형근 이사 설명이다. “(중국 관광객은) 경복궁 가는 것보다 명동 도는 걸 훨씬 좋아해요. 물건 좋고 음식 맛있고. 나이 성별 계층 따라 반응은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말하자면 맛있는 거 먹고 사람 구경하고 쇼핑할 수 있으니까 명동이 최고인 거죠.” 명동 다음으로는 ‘남대문시장-동대문시장’(일본), ‘동대문시장-고궁’(중국), ‘동대문시장-롯데월드’(홍콩)가 꼽혔다. 고궁을 첫 번째로 지목한 건 이국 문화에 끌리는 북미 및 유럽인. 아시아권에서는 태국이 유일했다.
2009년을 기준으로 한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의 절반 이상(56%)은 중국인과 일본인이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을 합치면 절대 다수(78%)가 아시아 방문객들이다. 한국에는 고궁에 감동하기보다 명동과 동대문시장, 롯데월드에 환호하는 고객이 훨씬 많이 온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꽤 서운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한국 관광의 핵심 경쟁력은 역사도, 절경도 아니다. 내다 팔 물건이다. 그들은 보기 위해서 한국에 오지 않는다. 사기 위해 온다.
소수정예 中 vs 인해전술 日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880만명(2010년 통계는 추정치).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사태라는 초대형 악재를 딛고 2009년(782만명)보다 13%나 늘었다. 성장 동력은 ‘차이나 파워’였다.
지난해 중국 관광객은 189만명이 한국을 찾았다. 2009년(134만명) 대비 성장률이 무려 41%다. 인파만큼이나 인상적인 건 구매력이었다. 지난해 중국 관광객의 1인당 지출액은 1588달러. 알뜰하게 1069달러만 쓴 일본은 대신 숫자(303만명)로 중국을 압도했다. 많이 와서 덜 쓴 일본과 덜 와서 많이 쓴 중국. 결과적으로 한국이라는 관광시장에서 중국과 일본은 지난해 처음 어깨를 견주게 됐다.
중국발 소비열풍의 핵은 화장품이다. 이형근 이사는 “화장품은 완전히 동이 난다. 브랜드 가리지 않고 너무들 좋아한다”고 말했다. 비밀은 한류와 가격이다. 더페이스샵, 스킨푸드 등 중국 현지에 진출한 한국 브랜드의 경우 한류 연예인 덕에 인기가 높은 반면, 가격이 한국보다 훨씬 높게 책정돼 있다. 한국에 온 중국 여성들이 박스째 한국 화장품을 사재기하는 이유다.
한때 일본 여성의 필수아이템이었던 비비크림도 중국 쪽으로 바람이 옮겨가는 추세다. 한스킨 명동점 관계자는 “원래 8대 2 정도 일본 손님이 많았는데 요즘은 딱 반반이다. 중국 고객은 한꺼번에 70만∼80만원씩 사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중국 ‘큰손들’과 달리, 일본인은 자기가 쓸 물건을 중심으로 조금씩 산다. 쇼핑품목도 김치, 김, 커피, 막걸리 같은 식품이 많다. 이 때문에 생필품을 파는 마트 선호도가 높다. 관광공사 조사를 보면 일본 관광객들은 2009년 ‘식료품(62.2%)-향수·화장품(37.8%)-김치-의류’ 순으로 사갔다. ‘향수·화장품(59.6%)-의류(43%)-인삼·한약재-담배’ 순서로 인기가 많은 중국과는 차이가 난다. 이병찬 관광공사 일본팀장은 “일본인은 한국 여행 중 인상 깊은 것으로 ‘맛있는 음식’을 꼽는다”고 말했다.
에버랜드와 수원 화성의 거리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실 수 있나요?”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다. 모수범 실장은 “한국 드라마 보면 포장마차에서 소주 마시는 장면이 많이 나오니까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사람이 꽤 있다”고 했다. 독주에 익숙한 중국인이 소주파라면, 일본인은 막걸리팬이다. 막걸리에 대한 중국인 평가는 평균 이하. 이형근 이사는 “중국인 중에는 막걸리를 마셔보고 ‘우유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질색하는 이가 꽤 있다”고 말했다.
지방도시 선호도에서도 중·일은 확연히 갈렸다. 중국은 무조건 제주도다. ‘청정바다 제주’가 브랜드로 각인된 데다 무비자 혜택 덕에 제주의 인기는 폭발하고 있다. 지난해 제주도 해외 관광객 73만명 중 절반이 넘는 40만명이 중국인. 일본(18만명)의 두 배가 훌쩍 넘는다. 제주에 온 크루즈관광객도 80%가 중국인이다. 가히 제주상륙작전이라 할 만한 인파다. 일본인에게는 부산, 경주가 인기도시다. 깃발 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단체관광보다 2박3일 단기 개별관광이 많은 것도 다른 점이다.
차이는 면세점 매출에서도 확인된다. 신라면세점 담당자는 “전체적으로는 일본, 중국, 기타 매출이 6대 3대 1 정도지만, 제주점은 70%가 중국 고객, 부산점은 일본 러시아 고객 매출이 월등히 높다”고 말했다.
수원에서는 목적지로 취향이 탄로 난다. 중국인 코스는 에버랜드로, 일본인 코스는 수원 화성으로 정해진다. 중국인들이 싫어하는 코스 가운데 인사동과 민속촌이 있다. ‘중국에 비슷한 곳이 많다’는 이유인데 수원 화성을 안 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 전문 여행사 관계자 말로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 빼고 놀이동산을 선호하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고 했다.
요즘 중국 관광에서 부상 중인 키워드는 ‘실버’. 지난해 중국 노인 1만명이 한국 노인대학이나 복지관 초청을 받아 방한했다. 실버관광 유치의 대표주자는 광주다. 지난해 광주 빛고을노인건강타운에는 47개 기관, 4200여명의 중국 노인이 찾아와 시설을 둘러보고 공연도 했다.
“시간이 많은 노인들은 항공기 대신 중국 동해에서 저렴한 페리를 타고 입국해 1주일에서 열흘씩 장기간 머무르다 갑니다. 고객은 장쑤성, 산둥성 출신이 많지만 내륙 노인들이 1박2일 기차 타고 해안까지 와서 다시 배로 갈아타기도 하지요. 서울 중심의 편중된 관광이 아니어서 지방관광 활성화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향후 2만∼3만명을 내다보고 있습니다.”(진종화 과장)
관광의 한류(寒流)
덩치는 크지 않지만 지난해 마이너리그에서 주목받은 플레이어들도 있다. 태국과 말레이시아다. 태국은 2009년 대비 38% 증가한 26만명, 말레이시아는 44% 늘어난 12만명이 한국을 찾았다. 이제 명동거리에서 태국인과 말레이시아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태국(57.1%)과 말레이시아(45.7%) 사람들이 한국행을 결심할 때 쇼핑은 역시 중요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아니었다. 차이는 여기에 있다. 두 나라 방문객에게 첫 번째 고려요인은 ‘자연’이었다. 눈이 없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한국은 겨울철 눈 보러 오는 스키관광의 목적지였다. 이 때문에 관광비수기인 11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겨울관광이 70% 안팎이나 된다. 틈새시장이라는 얘기다. 태국 전문 에이원여행사 이성기 차장은 “태국인들도 유적 관광보다는 겨울 스키와 놀이동산, 쇼핑을 즐긴다. 일본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게 한국의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