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 로비스트, 소나무, 첫사랑 그리고 김동호

입력 2011-01-06 15:10

PIFF 15년의 기록 <1>

박찬욱 감독은 그를 가리켜 ‘한국영화의 로비스트’라고 했다. 중국 왕자웨이 감독은 그에게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인 ‘소나무’를 떠올렸다. 어떤 신문은 그와 부산국제영화제(PIFF)의 관계를 온전히 내주고 기다리는 ‘첫사랑’ 같다 했고, 이용관 신임 집행위원장은 내년 16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최대 난제로 ‘그의 부재(不在)’를 꼽았다.

영화 제목 ‘박수칠 때 떠나라’를 실천하듯 성큼 물러앉은 김동호(74) 명예집행위원장이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이던 1980년대 중반. 아침 밥상에서 불쑥 자녀들에게 “배우 김혜자씨를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전날 문공부에 상 받으러 온 김혜자씨와 단 둘이 앉았는데 그분이 김혜자씨가 맞는지 몰라서 망설이다 축하인사를 못했다는 것이다.

영화는커녕 TV도 잘 보지 않아 배우 김혜자를 모르던 공무원이 지난해 10월 퇴임 파티에서 신성일 김지미 박정자 같은 원로배우들로부터 ‘영화인들의 아버지’란 칭송을 들었다. 영화와 인연을 맺은 건 8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이 되면서다.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문화부에서 27년간 공직생활만 했다. 영화인들이 보기에 그는 ‘낙하산’이었고, 낙하산이 아니라는 말 대신 그는 88년 이후 개봉된 모든 영화를 보며 거리를 좁혀 갔다.

4년간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지내고 예술의전당 초대 사장과 문화부 차관을 거쳐 공연윤리위원장을 맡은 1993년. 닐 조던 감독의 영화 ‘크라잉 게임’을 극장에서 상영토록 허용했다. 여자인줄 알았던 주인공이 남자로 밝혀지는 장면의 성기 노출이 논란을 불렀다. 그는 “규정상으론 안 되는 거였지만 그 부분이 빠지면 영화 전체가 무의미해져서 허용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케이블TV 교육 채널 사장, 동신대 객원교수를 하다가 부산으로 갔다. 영화제를 하나 만들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돈을 구하는 일이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가 자임한 것도 그 일이다. 1년의 절반을 해외 출장으로 보냈지만, 그의 비행기 좌석은 늘 이코노미 클래스였다. 그렇게 아끼면 해외 영화인을 2, 3명 더 초청할 수 있다는 게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지 않는 유일한 이유였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시장의 개막선언 외에 어떤 정치인도 인사말을 하지 못했다. 대선후보도, 문화부 장관도 그냥 게스트일 뿐이다. 문화는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 원칙을 만들어 지킨 것도 그다. 97년 남양주종합촬영소를 건립할 때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부닥치자 주민 100명과 일일이 잔을 기울이며 설득했던 이 영화인은, 부산국제영화제 15년간 가족을 위해 한 일이라곤 서울의 아내에게 아침마다 모닝콜을 해준 것뿐이라며 머리를 긁적인다.

이제 아주 멀찍이서, 언제까지나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켜보겠다고 말하는 김동호 위원장의 회고록 ‘김동호의 씨네마 부산- PIFF 15년의 기록’이 약 20회에 걸쳐 매주 연재된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택배오토바이로 누비던 길, 인생의 레드카펫 되다

화려한 퇴장이었습니다. 행복한 15년이었습니다.

지난해 10월 7일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장에서 피아니스트 노영심은 퇴임하는 저를 위해 직접 작사·작곡한 ‘당신의 이 순간이 오직 사랑이기를’을 연주했습니다. 가수 윤건은 노래를 불렀고, 배우 엄정화 문소리 예지원 김남길 황정민도 영상을 통해 노래했습니다. 애조 띤 이 곡은 개막식장을 메운 6000여 관중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대형 화면에는 지난 15년간 활동했던 제 모습이 소개됐습니다. 장이모 감독의 개막 영화 ‘산사나무 아래에서’가 상영되기 직전, 트레일러(영화 예고편)에는 택배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부산 남포동과 해운대를 오가는 제 모습이 담겼습니다. 영화제 초창기 3∼4년 동안 부산의 극심한 교통체증 때문에 저는 오토바이 뒤에 타고 해운대와 남포동을 오갔습니다. 저도 모르게 이창동 감독이 아이디어를 내서 연상호 감독이 이 일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더군요.

대만 정부가 주최한 ‘대만 파티’는 시작과 함께 불이 꺼지더니 대만 감독들이 저에게 헌정하는 영상물을 상영했습니다. 거장부터 신인까지 부산에 왔던 감독은 모두 저와 부산영화제에 헌사(獻辭)를 하더군요. 다시 불이 켜지는데, 한복을 입은 여배우 양구이메이(楊貴梅)가 ‘사랑해 당신을…’로 시작하는 가요 ‘사랑해’를 우리말로 유창하게 부르며 무대에 등장했고 저를 무대로 올렸습니다. ‘음식남녀’(1994) ‘애정만세’(1994) ‘구멍’(1998) ‘달은 다시 떠오른다’(2005) 등에서 열연한 대만을 대표하는 여배우죠. 부산에 오기 전 몇 달은 노래 연습을 한 것 같습니다. 허우샤오셴, 차이밍량 감독은 제게 대만 영화계가 주는 감사패를 수여했습니다. 깜짝 이벤트였고, 눈시울을 적시게 했습니다.

와이드 앵글 파티는 많은 영화인을 열광케 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국내외 젊은 독립영화인들을 위해 개최해 온, 밤을 지새우는, 전통 있는 파티입니다. 1년에 한 번 제가 젊은 영화인들, 특히 해외 게스트들과 ‘막춤’을 춰온 곳이기도 합니다. 이 파티에서는 독립영화인들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무동 태워져 장내를 돌았습니다. 제 퇴임에 맞춰 부산을 찾은 프랑스 여배우 쥘리에트 비노슈,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베로니크 칼레 프랑스 국립영화원 회장 등 많은 외국 게스트가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비노슈는 ‘나는 여배우로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고 미스터 김과 춤추기 위해 왔다’고 말하곤 저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신문들은 비노슈는 ‘막춤’을, 저는 ‘관광버스 춤’을 췄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 연예전문지 버라이어티의 패트릭 프레이저 기자는 10여 년 전 와이드 앵글 파티를 소개하면서, 밤늦게 술 한 잔 하고 도착한 제가 해외 게스트들과 ‘삼바 춤’을 췄다고 썼더군요. ‘막춤’이든 ‘관광버스 춤’이든 ‘삼바 춤’이든 상관없습니다. 비노슈가 누구입니까. ‘퐁네프의 연인들’ ‘프라하의 봄’ ‘데미지’로 친숙한 여배우죠. 1993년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블루’로 베니스영화제에서, 1997년 안소니 민겔라 감독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지난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증명서’로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세계적인 배우입니다. 그녀가 제 퇴임에 맞춰 부산을 찾아 저와 함께 정열적으로 춤췄다는 것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다음날 밤에는 ‘타이거 클럽’(제 이름의 虎자를 따서 지은 이름입니다) 멤버들이 모여 춤추고 노래하면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허우샤오셴 대만 감독, 사이먼 필드 전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 피터 반 뷰렌 네덜란드 영화평론가, 논지 니미부트르 태국 감독과 제가 멤버인 ‘술친구’들입니다. 14일 밤 공식 송별파티가 열렸고, 15일 폐막식에선 노영심의 피아노 반주에 가수 백현진이 멕시코 민요 ‘제비’를 구성지게 불러 또 한번 청중의 가슴을 적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15년간 정열을 쏟았던 부산국제영화제를 떠났습니다. 퇴임에 맞춰 ‘영화,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매년 절반을 해외서 보낸 제가 15년 간 심사위원으로, 혹은 귀빈으로, 또는 부산영화제 일로 방문했던 영화제 60여곳 중 38곳을 수록했습니다. ‘Mr. KIM Goes to Festivals’라는 영문 책자도 냈고, 그동안 해외에서 찍은 한국 감독과 배우들의 사진을 추려 ‘열정, 김동호와 친구들’이란 사진전도 열었습니다. 퇴임과 함께 저는 영화배우들, 감독들, 독립영화인들, 영화사와 영화단체들, 해외영화단체와 영화제들로부터 감사패와 공로상을 받았고, 신문과 방송의 조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퇴임했습니다. 보람과 영광을 안고 부산영화제를 떠났습니다.

지난 15년을 돌이켜 볼 때, 제 자신 ‘행운아’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부로부터는 은관문화훈장, 영화계에서는 대한민국 영화대상 공로상, 문화언론계에서는 오늘의 제1회 부산인상(신사고포럼)과 제1회 부산문화대상(부산MBC), 프랑스 정부로부터 두 번의 문화훈장과 파리시 및 도빌시 훈장을 받았을 정도니까요. 더구나 한도 끝도 없이 외국여행을 다녔으니까요.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런 영광은 매우 ‘불공정한’ 보상입니다. 저 혼자 이런 영광을 누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불모의 문화적 토양에서, 주변의 회의적 예측을 뒤엎고, 영화제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물불 가리지 않는 열정과 헌신을 쏟았습니다. 성공시켜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저와 함께 젊음을 불태워 온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현재 단독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용관 중앙대 교수, 부위원장인 전양준 영화평론가, 수석프로그래머인 김지석 전 부산예술문화대학 교수, 그리고 박광수 감독과 오석근 감독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의 제안과 주도적 노력으로 1996년 9월 부산국제영화제가 창설됐고, 그분들의 지혜와 헌신으로 오늘의 영화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젊고 유능한 역대 스태프들, 그리고 많을 때는 800명에 달했던 자원봉사자의 열정과 봉사가 뒷받침됐기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부산시와 정부의 예산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제1회 영화제부터 3년간 매년 3억원을 후원한 정희자 대우개발 회장을 비롯해 많은 협찬과 및 후원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매년 꾸준히 부산을 찾아주신 20만 영화 팬과 부산시민의 성원이 성공의 동력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바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이끈 주인공입니다. 모든 영광은 그분들의 것이어야 합니다. 이 많은 분들을 제쳐놓고 저 혼자만 15년간의 영광을 독차지하는 것은 몰염치한 일이죠. 저는 모든 분들께 대단히 송구한 마음으로, 큰 빚을 졌다는 심정으로, 그리고 한없이 고마운 마음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떠났습니다.

제가 15회를 마지막으로 영화제를 떠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부산국제영화제는 새롭게 도약할 확고한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했고, 세계적인 메이저영화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짧은 역사에도 급성장한 것은 ‘아시아의 새로운 감독과 영화를 발굴한다’는 기본 목표와 이를 가능케 한 프로젝트의 개발 덕입니다.

중국의 자장커 감독은 부산이 발굴해 세계적인 감독으로 성장한 대표 사례입니다. 한국의 김기덕 이창동 감독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세계 영화계에 소개된 감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98년 제3회 영화제에서 선보인 ‘부산 프로모션 플랜(PPP)’은 제작 자본을 구하지 못하는 아시아 감독·제작자들과 아시아 영화에 관심 있는 투자자들을 부산에서 만나게 해 준 ‘프로젝트 마켓’입니다. PPP를 통해 많은 아시아 감독이 영화를 완성했고, 그 영화들이 칸, 베를린, 베니스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감독이나 제작자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됐습니다. 2000년 로카르노영화제 은표범상을 받은 프룻 첸 홍콩 감독의 ‘리틀 청’, 지난해 베를린영화제 대상을 받은 세미 카플라노글루 터키 감독의 ‘벌꿀’ 또한 PPP 프로젝트였습니다.

감독 지망생을 교육해 감독으로 만드는 ‘아시아필름아카데미(AFA)’, 아시아 감독들에게 다큐멘터리 사전제작과 시나리오 개발, 후반작업을 지원하는 ‘아시아시네마펀드(ACF)’ 등의 프로젝트도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이런 사업들을 개발하고 추진해 온 영화제 핵심 멤버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 부산국제영화제는 더욱 안정적인 기조 위에서 도약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둘째로, 부산국제영화제 전용관인 부산영상센터 ‘두레라움’이 올해 준공됩니다.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가 호주를 대표하는 건물이듯,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이 연간 100만 관람객을 끌어 모으는 ‘명품건물’이듯, 새로 조성되는 두레라움이 부산의 랜드마크가 돼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2002년부터 이 사업을 추진해 왔습니다. 부지선정, 기본계획 마련, 국제 설계공모와 특히 예산확보에 주력했습니다. 아직 정부 지원의 건축예산은 모두 확보되지 못했지만, 허남식 부산시장의 결단으로 2008년 10월 기공식을 갖고 2009년 1월부터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올 9월 준공돼 제16회 영화제는 새 건물에서 개최될 것입니다. 따라서 두레라움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레라움이 개관되면 부산국제영화제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됩니다. 새 시대는 젊고 유능한 새로운 사람이 이끌어야 합니다. 제가 물러나야 하는 이유와 명분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제 ‘김동호 시대’를 마감하고 ‘이용관 시대’를 맞았습니다. 저를 제외한 창설 주역들이 계속 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이상, 영화제는 계속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두레라움과 함께 힘찬 도약의 시대를 열어 갈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렇게 볼 때 지난 15년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창설과 성장기’로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저는 그동안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15년의 역사를 정리해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