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대학생 언니·오빠들과 열공 중

입력 2011-01-05 19:24

김포서 임시 거주 연평도 아이들의 방학

4일 찾아간 김포시 양곡면 곡촌마을 LH아파트 3단지. ‘연평도 주민의 입주를 환영합니다.’ 입구에 내걸린 현수막이 바람에 날렸다. 연평도 주민 1000여명이 지난달 19일부터 임시 거처로 머물고 있는 곳. 총 115가구로 2~3가정이 한 세대를 이뤄 생활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 대학생들이 이 곳에 여장을 풀었다. 연평도 아이들의 과외 선생님이 되겠다며 짐을 싸들고 나온 학생들이다.

연평도 공부방이 5일 문을 열었다.

서울대 연세대 카이스트 이화여대 건국대 홍익대 등 각 대학 학생 105명이 공부방 교사로 나섰다. 기간은 2월 17일까지 7주. 연평도 주민은 방학기간 자녀 교육을 맡아달라며 대학생들에게 김포 아파트 한 가구를 통째로 내줬고, 대학생들은 연평도 아이들을 돕겠다며 방학을 반납했다. 연평도 초·중·고교생 182명 중 공부방에 오기로 한 학생은 40여명. 이제 공부방 학생들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영어 국어 수학 과학 등의 과목을 원하는 만큼 무제한으로 배울 수 있게 됐다. “15명씩 돌아가며 일주일씩 아이들을 가르칠 거예요. 오래 머물고 싶은 친구는 더 오래 있기도 하겠고요.” 생각 같아서는 7주 내내 상주하고 싶다는 안홍기(26·건국대 토목공학과)씨가 말했다. 첫 날, 모두가 들떴다.

“서울대 갈 거예요”

유독 눈에 띄는 한 아이. 영하 10도를 밑도는 추위에 핫팬츠 차림이었다. 검은색 스타킹에 진분홍 양말을 신었다. 고1 임지은(가명·15). “화장했네요?” “네.” 아이라이너에 마스카라까지 곱게 칠했다. 또래보다 작아 키 크는 한약을 먹기 시작했다는 지은이. 방학 계획을 묻자 “반 배치고사 잘 봐서 장학금 받고 싶어요. 엄마한테 미안한 게 있어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은이는 엄마와 단둘이 산다. 아빠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갔다. 엘리베이터, 주차장 설계 일을 보던 아빠는 사우디에 가면 몫 돈을 마련할 수 있다며 지난해 2월 출국했다. 학교를 자퇴한 오빠(19)는 검정고시를 준비한다며 인천에 방을 얻어 나갔다.

엄마는 연평도 식당 주인이다. 군인들이 자주 찾는 맛집이다. 주 메뉴는 아구찜 불고기 삼합. 지은이 중 2때, 연평도에 오기 전에는 인천에서 쌈밥집을 운영했던 엄마다. 엄마는 오랜 식당일에 척추를 다쳤고, 디스크 수술까지 받았다. 45세. 골다공증까지 겹쳐 고생하신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23일, 5교시 수업 중이었다. 포탄은 엄마 가게를 향해 떨어졌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모한테 전화했더니 받으시더라고요. 엄마 중학교 방공호로 대피했다고 괜찮다고, 곧 너 데리러 갈 거라고.” 지은이는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 전쟁 나는 줄 알았죠”라며 몸을 웅크렸다.

방공호에서 하루, 다음날 새벽 피란 대열에 합류해 부리나케 섬을 빠져나온 게 벌써 한 달 반 전 일이다. 그 일을 겪은 뒤 지은이는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고, 엄마 아빠 시골에 땅 사드려서 같이 살고 싶어요. 돈. 돈 많이많이 벌어야 해요.”

지은이는 우등생은 아니지만 밝고 착해 친구가 많다. 그래도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엄마가 힘들까봐 아침밥도 마다하고 학교에 다닌 지은이. 고생하시는 엄마 아빠에 방황하는 오빠까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열심히 공부해 반 배치고사에서 1등 하고, 장학금 받아서 엄마를 웃게 해드리는 게 지은이가 방학에 세운 목표다. 가고 싶은 대학을 물었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서울대 갈 수 있다고 해서요. 서울대 갈 거예요.”

“제발 공부 좀 시켜주세요.”

지은이는 하지만 특별한 경우다. 대부분의 연평도 아이들은 피폭 이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연평도학부모위원장(40·여)은 “고3, 고1에 올라가는 자녀 둘이 있다”며 “영종도 운남초등학교로 등교하느라 매일 1시간 이상씩 차를 타고 다녔다. 아이들은 지쳤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다”고 걱정했다. 중3 딸을 둔 주민대책위원장인 김재식(50·어업)씨는 “피폭 이후 인천의 각 학교로 흩어진 아이들은 저마다 놀림감이 됐었다”며 “다른 문제도 많지만 교육이 제일 신경 쓰이는데 대학생들이 와서 가르쳐준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말했다.

찜질방에서 배식봉사를 하던 대학생들은 주민들이 자녀 교육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자 무료로 과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찜질방에서 과외를 하려던 계획은 주민들의 김포 아파트 임시 거주가 결정되면서 공부방 개설로 발전됐다.

“경기도교육위원회측이 방학 특별 수업을 학교에서 해주겠데요. 거절했죠. 우리 아이들이 또 멀리 차타고 나가야 한다 생각하니까 아니다 싶더라고요. 아파트 단지 안에서 대학생들이 가르쳐주는 게 훨씬 좋죠. 그래서 밀어붙였어요.” 김 위원장의 얘기다.

학부모들이 바라는 건 성적이 아닌 동기부여. 농어촌 특별전형으로 대학을 들어가는 아이들에게 입시는 도시 아이들이 느끼는 것과 다르다.

공부방을 총괄하는 임나연(27·이화여대대학원 성악과)씨가 분위기를 전했다. “아이들이 참 자유분방하다고 부모님들께 농담처럼 말씀드렸어요. 열심히 공부하려는 아이들이 사실 많지 않거든요. 학부모님들이 바라시는 건 ‘제발 공부 좀 시켜 달라’예요.” 내신만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 지 고3 수험생도 느슨하단다.

초기 군기를 잡겠다고 벼르던 강대엽(22·광운대 전자정보통신학과) 선생님. 아이들을 만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친해지고 봐야겠다 싶더라고요.” 특전사의 아들로 해병대 입대를 꿈꾼다는 강씨는 험상 궂은 표정으로 아이들을 쳐다봤다가 되레 웃음거리가 됐다. “저랑 수준이 맞더라고요. 초등학생은 저보고 악마같이 생겼다던데요”라며 깔깔 웃는 강씨. 아이들의 친구이자 형, 오빠가 되기로 마음먹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강씨가 맡은 과목은 수학. “수능 시험에서 수리 만점이었고 고등학교 때 수학 성적이 항상 전교 3등 안에 들었다”는 강씨는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되 최대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조다미(23·이화여대 법학과)씨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지역아동센터에서 교사로 활동한 베테랑 선생님. 조씨는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것밖에 없어서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시간을 쪼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줄곧 장학금도 받아온 조씨. 자칫 아이들이 다가가기 힘들지 않을까. 조씨는 짓궂은 남학생의 농담도 곧잘 받아 넘겼고, 누구보다 즐거워했다.

처음 현장 봉사에 참여한다는 김민철(25·명지대 법학과)씨는 “아이들이 먼저 다가와 깜짝 놀랐다”며 “하루 만에 아이들 선생님들과 친해져서 너무 좋다. 교환학생 준비하느라 영어 공부 한 게 있는 데 그 때 공부한 걸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세계 제일 부자, 인권변호사, 사회적 기업가, 구호단체 식량 전문가 등 각자의 꿈에 대해서도 아이들과 나누는 대학생 선생님. 1대1 멘토링까지 더해지니 아이들도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자비 봉사

공부방 운영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대학생 선생님 부담이다. 105명의 학생 모두 1인당 9만2000원씩을 냈다. 추가로 발생하는 비용도 이들 몫이다. 등록금만도 만만치 않을 텐데 학자금 대출을 받아가면서,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공부방 교사로 자원했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에 돈을 쓰듯이 시간과 물질을 내서 활동하는 데 의미가 있어요. 기업 후원 봉사는 돈 한 푼 안내도 되고 마지막에 현수막 들고 기념사진 찍고 오면 되잖아요. 저희는 근데 직접 후원도 끌어내야 하고 내 돈도 들여야 하고. 다르죠 확실히.” 윤소영(22·연세대 아동가족학)씨가 설명했다.

스펙 쌓기라면 차라리 다른 봉사를 알아봤을 터이다. “제가 가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이렇게 봉사하고 많은 사람들 만나게 하신 건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해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고···.” 윤씨처럼 신앙인으로서 나눔과 봉사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봉사자도 많았다.

이들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사람에 치이고 지친 연평도 주민들도 아이들도 속마음을 꺼내 보였다.

“기자들이 와서 물어보면 말 안해요. 똑같은 질문만 하니까 다들 귀찮아하고. 대학생 누나 형들하곤 다르죠.”(김준휘·연평고2)

연평도 공부방이 잘 운영되면 제2, 제3의 공부방을 열고 싶다는 대학생들. 수업 첫 날부터 문의 전화는 쏟아졌다. 소문을 듣고 교사로 참여하겠다는 대학생, 자녀를 보내겠다는 부모. “애들이 너무 착하고 귀여워서 선생님들이 다들 너무 신나고 재밌게 하고 있어요. 저희가 자비로 부담하는 거고요. 빨리 가입하실 수 있도록 조치 취하겠습니다.”

공부방은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다. 교사로 참여를 희망하는 대학생은 V원정대(www.73day.net)로 신청하면 된다.

김포=글 이경선 기자·사진 김지훈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