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조용래] 욕쟁이 세상

입력 2011-01-05 17:43

“배고파? 우리는 묵고살기도 힘들어 죽겄어 이눔아. 청계천 열어놓고 이번엔 뭐 해낼껴?” 욕쟁이 할머니 강종순씨가 이명박 대통령 후보에게 국밥 한 그릇 퍼주면서 독설을 퍼붓는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 이 후보 대세론에 결정적인 힘을 실어준 선거광고방송 2탄의 첫 대목이다.

광고방송의 백미는 끝자락. 다시 한번 욕쟁이 할머니의 독설이 나온다. “밥 처먹었으니까 이제 경제 좀 살려라 잉, 알긋냐?” 경제대통령 이명박의 이미지 홍보로는 최고였다. 나중에 욕쟁이 할머니가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 주인이라는 게 확인됐지만 대세는 이미 기운 뒤였다.

재래시장 국밥집을 배경으로 한 욕쟁이 할머니 선거광고는 서민코드를 적절히 버무리면서 우리의 욕 문화코드를 자극했다. 사실 욕으로 따지자면 우리 모두는 가학(加虐)·피학(被虐)의 취미를 지녔다. 욕쟁이 할머니에게 호의적인 것은 그것이 피학적 정화(淨化) 과정이라고 느끼기 때문일까.

비슷한 욕쟁이 할머니 가게가 전국적으로 적지 않은 까닭이다. “야, 이 ○끼야 많이 처먹어. 똥구녕으로 처먹지 말고. 일 열심히 해야 할꺼 아녀?” 오늘도 ‘보리○디 자석들’과 ‘○병 지랄하고 자빠진 놈덜’은 욕쟁이 말투 속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힘을 얻고 사는지 모른다. 입만 열면 ‘씨○’ ‘○같이’ 등을 쏟아내는 가학 취미에 대한 반성일까?

욕은 습관적이다. 말에 끼어드는 양념. 하지만 양념이 지나치면 재료 맛은 사라지고 본질은 왜곡되기 쉽다. 말은 생각의 근거인데 말살이가 훼손되면 진의(眞意) 전달은 고사하고 다양성 상실, 창의력 저하를 피하기 어렵다.

요즘 우리 청소년들이 딱 그렇다. ‘존나’와 ‘졸라’가 우리말의 수많은 부사를 모두 압도했다. 여성가족부 자료에 따르면 청소년 73.4%가 매일 욕설을 사용하고 온라인 게임 등을 통해 욕을 배운다. 게다가 욕설의 원래 뜻을 아는 청소년은 27%에 불과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저 또래가 사용하니까 덩달아 쓴다는 얘기다. 우리 욕은 이웃 일본말 욕과는 달리 성적 표현이 매우 많다. 예컨대 ‘존나’ ‘졸라’도 원래 남성 성기 표현에서 전화된 말이다. 욕쟁이 할머니의 욕설은 고향과 어머니 냄새라도 피우지만 성적 욕설은 허망하기 짝이 없다.

서민경제는 어렵고 취업은 안 되고 공부 압박은 날로 더해가니 애어른 할 것 없이 욕쟁이 세상으로 빨려가는 듯하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이런 게 아닌데도. 새해 맞아 모두들 조금씩 달라졌으면 좋겠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