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호경] ‘조중동 종편’에 대한 단상

입력 2011-01-05 17:43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1997년 12월 17일.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를 출입하던 기자는 입사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신출내기였다. 그런데 많은 선배 기자들의 분위기나 움직임이 평상시와 달리 심상치 않다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친하게 지내던 부산일보 선배를 비롯해 언론사 구분 없이 기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굳은 얼굴과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나아가 은밀하게 연판장 같은 걸 돌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지 않아 어떤 일이 진행됐는지 알 수 있었다.

‘공정보도를 위한 우리의 뜻.’ 당시 한나라당, 국민회의, 국민신당을 출입하던 46개 신문·방송·통신사 정치부 기자 103명이 서명한 1장짜리 성명서 제목이다. 대선 투표일에 임박해 모 중앙일간지의 보도가 갈수록 편향성을 띄자 동종업계 기자들이 직접 나서 “○○일보의 대선 보도는 언론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엄중 경고한 것이다. 이들은 일종의 양심선언 성격을 겸한 성명서에서 “언론이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는 오만과 독선을 갖거나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자처한다면 더 이상 언론과 이 나라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며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린 언론인의 각성을 촉구하며 공평무사한 본연의 자세를 되찾을 것을 결의한다”고 밝혔다. 같은 날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한국기자협회,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가 똑같은 취지의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실 문제의 일간지뿐만 아니라 당시 대선을 둘러싼 주요 언론사들의 보도에는 특정 후보에 대한 호·불호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곤 했고, 그 당연한 결과지만 각 후보에게 미치는 유·불리 또한 연일 상당한 것이었다. 그건 입사 1년도 안 된 햇병아리 기자가 보기에도 불 보듯 확연한 것이었다. 그러니 피해 당사자인 복수의 대선 후보와 정당 및 그 지지자들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시기 또 하나 기억나는 사건은 다른 중앙일간지와 연관된 것이다. 이 일간지의 보도가 특정 대선 후보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자 당원들이 신문사 사옥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해당 신문사 간부가 던진 말은 이런 것이었다. “너네들 뭐 하는 거야! 너네들, 내일 모레면 끝이야. 너희는 싹 죽어, 까불지 마!”

기자가 정치부 기자를 시작하기 전이나 이후에나, 영향력 있는 언론의 선거 개입에 따라 타깃이 된 정당 측이 반발한 사례는 드물지 않았다. 14대 대선 때 정주영 후보 측이 그랬고, 16대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측이 그랬다. 기자가 굳이 동종업계의 부정적인 과거 사례를 떠올린 것은 2011년이라는 이 시점에서도 상황이 그렇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3일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이른바 ‘조중동 종편’에 대한 강한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5일에는 긴급 토론회도 열었다.

야당은 종편 방송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선정성이나 과다경쟁도 걱정하지만, 그보다 편향 보도를 훨씬 더 경계하고 있다. 물론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야당이 지나친 피해의식을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시절의 ‘학습효과’를 감안할 때 신문과 방송 파워가 결합한 유력 언론사들에 대한 이들의 전전긍긍을 근거 없는 망상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비단 이들 언론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선거의 계절이 다가올수록 여타 신문과 방송을 둘러싼 편파·왜곡 보도 시비는 거세지기만 할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양 팀이 사활을 걸고 벌이는 치열한 경기에 공정한 심판으로서 자리매김해야 할 언론이 직접 선수로 뛰어들어 공수 양면에서 리베로 활동을 벌이곤 하기 때문이다. 진보를 표방하든 보수를 표방하든 중도를 표방하든, 언론의 정도와 상궤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사회적 신뢰와 권위를 스스로 높여야 한다. 매체의 덩치와 파워가 더욱 커진 언론일수록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김호경 정치부 차장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