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진홍]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입력 2011-01-05 17:44
“공적 문제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제한하지 않는 추세… 정부도 대범해졌으면”
프랑스 여성들이 참정권을 보장받은 때는 1946년이다. 전 세계에 민주주의 불꽃을 확산시킨 1789년 시민혁명 이후 157년이나 걸렸다. 이 기간 여성에게 투표권 등을 줘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이 줄줄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가부장적 문화에 빠져있는 지배층에게 ‘남녀평등’이란 듣기 불편한 말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여성 참정권 보장을 외친 이들은 지금 선구자로 불린다.
이들이 주는 교훈은 또 있다. 진부한 얘기가 돼버렸지만, 민주국가의 국민이라면 마음대로 생각해야 하고, 생각한 바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도 일찌감치 깨우쳐줬다.
이런 흐름은 미국에서 두드러졌다. 1960년대 베트남전 참전에 반대하는 시위가 미국 곳곳에서 격렬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시위에 개의치 않고 베트남전 수행에 매진했다. 집권세력이 국정운영의 부담에도 참전 반대시위를 벌일 국민의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법원도 가세했다.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베트남전 참전에 항의해 검은 완장을 차고 등교했다는 이유로 정학처분을 받은 사건에 대해 미 대법원은 학생들 손을 들어줬다.
우리 헌법도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어떤 제한도 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야간 옥외집회와 관련한 집시법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이유다.
‘표현의 자유’란 개념은 아직 미완(未完)이다. 절대적 권리라는 견해도 있고, 검열과 같은 사전 억제를 금한 것이지 절대적인 보호 대상은 아니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사적(私的) 관계가 아니라 공적(公的)인 관심사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두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공적 문제에 대한 논의에는 불쾌감을 주는 비판까지 포함한다는 ‘미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사건’ 판결(1964년)이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말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헌재가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제1항(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를 이용해 허위의 통신을 하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을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공익(公益)의 의미가 불명확해 어떤 표현이 공익을 해하는지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으며, 표현행위를 규제할 경우 위축효과가 커 ‘명백하고 현존하는 구체적인 위험’을 야기하는 허위사실에 대해서만 제한할 수 있다는 게 헌재의 논리다. 1961년 제정돼 거의 사문화되다시피 한 이 법은 현 정부 들어 ‘광우병 괴담’ 등을 처벌하는 데 사용돼온 것이어서 파장은 컸다.
그러자 정부와 여당은 즉각 “전쟁 등 국가적·사회적 위험성이 큰 허위사실 유포 사범에 대한 처벌규정 신설을 조속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유언비어로 혼란이 가중될 경우 국정운영에 어려움이 예상되고, 사회적 비용 또한 만만치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국민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과 관련된 사안인 만큼 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국민들에게 처벌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심어줌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다. 허위사실을 걸러내는 국민들의 합리적 판단 능력과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마저 있다. 국민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정부가 재단하거나 허용해준다는 식의 접근도 경계해야 한다.
네티즌들이 국경을 넘어 언제든지 소통하는 시대다. 소통의 도구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표현의 자유’란 말 자체가 아예 사라질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자유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정부와 여당이 헌재 결정으로 법 공백이 생겼다며 법석을 떨 게 아니라, ‘동의하지 않는 표현에 대해서도 자유를 보장하겠다’며 헌재 결정을 흔쾌히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어땠을까.
김진홍 편집국 부국장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