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치산치수 영웅에게 길을 묻다(上)
입력 2011-01-05 16:49
지난 12월 24일 일본 이즈모시 루터교회 앞. 눈보라를 동반한 강풍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불었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이곳의 일상적인 날씨 현상이었으나 이날은 유독 심했다.
루터교회 뒤로 수백년 된 소나무 숲이 병풍을 이루고 있었다. 그 숲 때문에 한결 바람이 덜하다는 것이 동행한 데라이 도시오(77·역사학자)씨의 설명이었다. 맞바람을 헤치고 숲으로 다가서자 소나무는 한결같이 일본 본토를 향해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피사의 사탑 기울기였다.
이곳 사람은 이 숲을 야도오리산(八通山)이라 부른다. 언덕 정도이지만 산이라고 부르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639년. 이즈모평야를 관통해 동해 바다로 빠져 나가는 히가와(江)가 대홍수로 범람했다. 1637년에도 홍수 피해를 입었던 이즈모평야 농민들에겐 재기 불가능한 범람이었다. 더구나 대홍수로 히가와의 흐름이 동해에서 신지코호로 바뀌어 버리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지도 참조). 강 흐름이 바뀌자 이즈모평야는 동해에서 불어오는 모래 바람으로 사막화가 급속하게 진행됐다. 논밭으로도 쓸 수 없는 거대한 황무지가 돼버리고 만 것.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마쓰에번의 영주 마츠다이라 나오마사(도쿠가와 이에야스 손자)는 사막화로 세수가 감소하자 농본령을 발표해 농민을 쥐어짰다.
당시 중농이었던 오오카지 시치베에. 기근에 허덕이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집으로 쌀을 꾸러 오는 것을 보고 큰 결심을 하게 된다. 데라이씨의 얘기.
“강이 사라지자 꽤 넓은 땅이 생겼어요. 번에서는 측량을 해 농경지를 만들려고 했으나 모래땅이라 포기하고 말았죠. 이때 시치베에가 나섭니다. 바로 이 방풍림을 조성하기 시작한거죠. 번은 개발은 허가하나 재정 지원은 불가하다고 했어요. 시치베에는 굴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던 농민 한 사람과 목책을 세워 바람을 막습니다.”
시치베에는 5년 간 목책을 타고 넘는 모래와 싸우며 방풍림을 조성했다. 쉬나무 싸리나무 띠나무는 모래에서도 잘자라 모래산이 무너지지 않는 데 도움이 됐다. 잡목 조성을 마친 그는 소나무 모종 에 나섰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 모래땅이라 수분이 부족해 그대로 시들어 버렸다. 모종 뿌리에 진흙을 붙여 재시도했다.
그러기를 15년. 송림이 울창해지면서 야도오리산 내륙쪽으로 식물이 자라기 시작했다. 번은 그제야 시치베에를 인정하고 오오키모이리(주민 감독) 직위를 부여한다. 그리고 ‘특별명령 7조’를 발표하여 죄수 등을 투입, 요즘으로 치자면 신도시 건설에 나선다. 40가구로 시작된 이주 마을은 그러나 척박한 토양 때문에 밭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아 주민 폭동 등의 위기를 맞는다. 1663년 치안 무사가 파견돼서야 안정을 이룬다.
번의 지원에 힘을 얻은 시치베에는 벼농사를 짓기 위한 강폭 7m의 용수로 건설에 나선다. 히가와에서 동해로 빠지는 용수로만 만들어진다면 옥토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측량에 나서자 뜻밖의 벽에 부딪힌다. 가옥과 논밭이 수용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 농민들이 강하게 저항했던 것.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주민 설득에 나서 해당 30개 마을 모두에 토지 소유의 혜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모래땅에 보(洑)를 쌓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요즘 같이 중장비가 있으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렵사리 나무로 보를 쌓아 통수를 하면 무너지기 일쑤였죠.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에는 치명적이었고요.” 데라이씨는 당시 용수로 도면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홍수보다 더 큰 문제는 용수로를 따라 물이 동해에 닿기도 전에 모래땅에 흡수돼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인부들이 태업을 벌이고 마을에 들어가 행패를 부렸다. 또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신사는 이해 당사자인 주민 편에서 공사 중지를 요청했다.
아라키커뮤니케이션센터(주민센터) 다쿠로우 요네다 센터장은 “간척에 따른 농지 분배의 약속이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같다”며 “결국 훗날 이 약속은 지켜졌다”고 말했다.
시치베에는 용수 흡수 문제를 용수로 바닥에 돗자리 5만개를 깔고 진흙으로 덮어 해결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이 공사로 그는 전재산을 팔아 비용으로 충당했다.
그가 간척에 나선지 30여년. 용수로를 통해 이즈모평야에 농수가 공급돼 옥토가 됐다. 7m 폭의 용수로는 사실상 운하가 되어 일본 전통 나무배 다카세가 운항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카세천의 어원이 됐다. 마쓰에번은 이 운하가 생기기 전 신지코-나카우미-동해로 이어지는 항로를 택해 오오사카까지 쌀 수송을 했다.
한데 시치베에 마음속에 걸리는 딱 한 가지가 있었다. 히가와의 물을 끌어들이는 수문이 나무로 되어 있어 견고성이 떨어졌던 것. 1689년 봄 큰 비가 내리던 날 수문 붕괴를 염려한 그가 비를 맞으며 수문 말뚝을 보강하다 쓰러지고 말았다. 운명 직전 그는 아들 트모사다에게 재설계도를 물려주고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트모사다는 그해 가을 실종되고 말았다. 번의 관리였던 그가 왜 실종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법을 어겨 처형됐다는 설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 바람에 시치베이 가문은 간척 공적으로 받은 논밭을 모두 뺏기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치베에의 아내 마츠와 며느리 사다는 트모노리에게 할아버지의 유업을 잇도록 했다. 그리고 1712년 마침내 430m에 달하는 갑문식 구리하라 암벽통로를 완공한다. 이 갑문식 통로는 파나마운하의 갑문식보다 200여년 앞선 것이다.
22일 이즈모 시내 다카세천. 이즈모시 도시계획조정관 기시 카즈유키씨가 건설성으로부터 받은 ‘생활하천 30선’ 수상 기념석 앞에서 다카세천의 역사를 설명했다.
“사막화됐던 이즈모 들판에서 논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다카세천 때문입니다. 인력만으로 이뤄낸 대역사로 그 길이가 8㎞입니다. 지금도 친수환경으로 이용되는 시민의 자랑거리입니다.”
시의원 진베 젠고씨도 중심부를 흐르는 다카세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어린이들은 물놀이와 고기잡이, 어른들은 천변에서 마츠리(일본식 축제), 장기, 불꽃놀이 등을 즐긴다고 말했다.
19~20세기에는 잠업 요업 염색업 기와공장의 용수로도 쓰였다. 당시 목조주택이 많아 방화용수로도 톡톡히 역할을 했다. 동해와 닿는 하구에서는 조류 관찰 및 습지 탐사의 공간으로 활용된다. 시치베이 후손이 개발한 마부천, 묘오센지천, 즛겐천, 사시미천 등도 근대 이후로 그 기능이 유사했다.
시치베에 간척 300여년. 인구 14만여명의 이즈모시는 마쓰에시와 함께 물의 도시가 됐다. 곳곳에 폭 4m~7m 수로가 친수환경을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도시가 됐다. 도시가 경제력을 갖췄을 경우 그 친수환경이 유지가 되고 아닐 경우 19세기말 20세기초처럼 공업용수 하천 용도로 쓰였다.
그러나 해상 운송의 혁명적 역할을 했던 운하의 기능은 철도와 지상 운송수단의 발달로 한 세기만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4대강 운하논란에 참고할 대목이다.
25일 오후 다시 루터교회 앞. 시치베이 가문이 건설한 세 곳의 방풍림은 시민의 바람막이가 되고 있다. 방품림이 없었다면 도시는 제기능을 잃을 것이다.
2000년 33.9㎞의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된 후 새만금간척지는 비산먼지와 전쟁 중이라는 소식이다. 갯벌이 건조해지자 바닷바람에 먼지가 되어 날리기 때문이다. 이 먼지는 과실물과 나뭇잎에 달라붙어 성장에 장애를 입힌다. 한국농어촌공사는 염생식물을 심어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하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닌 것 같다. 이즈모 간척 이후 300년 간의 변화는 새만금간척지에 좋은 교과서가 될 수 있을 듯 하다.
시치베에는 5년간 나무를 심었으며 25년간 용수로 공사를 했다. 또 3대에 걸쳐 생태의 변화를 주시하며 자연을 극복했다. 건설기기 발달은 시치베에 30년 개발을 단숨에 1년으로 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개발된 자연은 당대의 우리만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태의 순환을 지켜보며 조금씩 개발해 나갈 일이다.
이즈모(일본)=글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사진 윤여홍 선임기자취재 지원 : 일본 재단법인 인간자연과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