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영 목사·미혼모 기리나씨 ‘두 여자 이야기’

입력 2011-01-05 18:14


지난해 12월 말, 대전에 눈발이 날렸다. 오랜만에 내린 눈이었지만 사람들은 하얗게 변한 세상을 즐길 여유도 없어보였다. 주머니 깊숙이 손을 찔러 넣은 채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 사이에 두 명의 여성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러곤 강추위를 녹일 만큼 따뜻하게 서로를 감싸 안았다. 다정한 모습이 모녀와 같았다. 젊은 여성이 엄마뻘 되는 여성의 볼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그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뭔가 둘만의 사연이 있는 듯했다.

어린 사랑, 그리고 아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기리나(26·여)씨는 사랑에 빠졌다. 한 남자를 사랑했다. 아기를 낳았다. 하지만 한 살 연상의 그 남자, 책임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그의 말이 큰 상처가 됐다. “원치 않았던 아기다.” 무지막지한 폭행은 오히려 참을 만했다. 아기가 태어난 지 1년째 되는 날, 그녀는 지옥 같았던 그 집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후 남자가 다시 찾아왔다. “돌아와줘.” 돌아가도 똑같다는 걸 알면서 마음 약한 기씨는 뿌리치지 못했다. 폭행은 이어졌다. 경제적 상황도 나빠졌다. 그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1366’. 버스 광고판에 붙어 있는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번호를 눌렀다. “일단 한번 와보세요.”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그는 대전 오정동에 위치한 ‘여성긴급전화 1366 대전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그곳에서 만난 김관식 목사는 기씨를 따뜻하게 대했다. 중학생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 품에 안긴 것 같은 느낌, 참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처음 만나게 됐다. 그는 김 목사와 함께 치유 사역을 하던 한 중년 여성을 알게 됐다. 오현영(55) 목사였다. 둘은 그렇게 만났다.

기씨에게서 자신을 보다

오 목사는 한참 기씨를 바라봤다. 푸석푸석한 피부, 웃음이 사라진 얼굴, 축 처진 어깨. 어디서 봤더라. 자신의 예전 모습이었다.

스물여섯 되던 해 겨울. 그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남편의 죽음. 남겨진 아들과 딸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영문도 모른 채 울고 있었다. 힘든 나날이 계속됐다. 돈을 벌 방법도 찾기 어려웠다. 왜 자신이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하는지 억울해 매일 밤 눈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별 후 9년 만에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허락하시더라고요. 함께 사역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든든했습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아픔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재혼 후 더 많은 아픔이 다가왔다. 새 남편의 아이 3명과 오 목사의 아이 2명은 사사건건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처음엔 누가 먼저 화장실을 쓰느냐는 것을 놓고 말다툼을 했다. 그러다 점차 폭력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비행청소년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비뚤어진 언행으로 집안 갈등은 깊어져 갔다. 급기야 오 목사는 정신분열증세를 보이며 자살 충동에 사로잡히기까지 했다.

“그때 하나님이 움직이시더군요. ‘직접 아이들을 치유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는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치유 상담을 하면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 수 있었다. 기씨를 만난 건 오 목사가 YWCA에서 내적치유 상담실장을 맡고 있던 때였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시련

기씨는 아기와 함께 오 목사가 운영하고 있던 대전주사랑교회 산하 쉼터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악착같이 일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해 돈을 모았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일하던 그에게 다시 한번 어둠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이번엔 병마였다. 루푸스병. 면역계가 이상을 일으켜 오히려 자신의 인체를 공격하는 병이다. 기씨는 합병증으로 정신분열증세까지 나타났다.

병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렇게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데….’ 눈물만 흘러내렸다. 경기도 고양시 복음병원에 입원해 있던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처음 겪는 일이라 신기했다. “돌아가겠습니다. 예전의 건강했던 때로. 신앙을 다시 찾겠습니다. 아이도 돌려주세요,” 생각지도 않은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찬송을 부를 때였다. ‘똑똑!’ 문을 열고 두 사람이 병실로 들어왔다. 오 목사와 김 목사. 은인과도 같은 사람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정신이 쇠약해져 그 두 사람을 찾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기씨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뒤 오 목사는 별안간 사라진 기씨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기씨의 새어머니는 인연을 끊었다며 그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찾는 데 시간이 걸린 건 그 때문이었다. “돌아가자. 병원 치료도 중요하지만 믿음으로 다시 한번 일어나보자.” 오 목사는 기씨를 끌어안은 채 울면서 말했다.

“충격 받을까봐 말을 못했어. 아이는 고아원에 있단다.” 기씨의 마음은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오 목사가 찾아오려 애썼지만 친모가 아니라 쉽지 않았다. 결국 기씨가 직접 고아원을 찾았다. 자신을 그렇게 따랐던 아들이지만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고아원장은 “엄마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아이가 큰 충격을 받았어요”라고 말했다. 여자 옷을 입고 있던 아들의 모습.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찬양사역자가 되다

“신학을 해보지 않을래?” 오 목사의 권유에 기씨는 반복해 거절했다.

“목사님 제가 무슨 신학을 해요.”

사실 돈을 벌고 싶었다. 그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 목사는 수차례 강권했다. “기도해 보니 넌 하나님께 쓰임받을 사람이야. 너의 열정을 하나님 영광 돌리는 데 쏟아보렴.”

기씨는 오 목사의 말을 계속 거역할 수 없었다. “단순히 한 인간의 말로 들리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결국 그는 오 목사의 말을 따라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기씨는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하나님을 믿은 뒤 찬양을 부를 때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신학을 하면서 그 달란트를 이용하고 싶었다. 찬양사역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오 목사님과 함께 이런 얘기를 나누곤 해요. 우리처럼 어렵고 힘든 사람, 미혼모, 가정폭력을 당한 사람, 루푸스병같이 몸이 아픈 사람 등을 위해 힘을 모으자는 얘기요.”

기씨는 음악 전도사가 됐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안 좋은 일이 참 많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고난이 없었다면 전 오 목사님도, 하나님도 만날 수 없었을 겁니다. 제게 간증거리, 말할 거리를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드려요.”

지난 크리스마스 주사랑교회에서 열린 전도사 임직식.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아들도 와서 박수를 치며 축하했다. 오 목사와 아들을 함께 안은 기씨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번만큼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대전=글 조국현 기자·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