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전남 완도군 청산면 청산등대교회의 신년예배 풍경

입력 2011-01-05 15:21


“목사 양반, 아침에 해뜬 거 봤지라? 오랜만에 일출이 참 이뻐.”

2일 오전 10시30분, 전남 완도군 청산면 진산리 해돋이 마을이 시끌벅적해졌다. 두꺼운 옷을 껴입은 할머니 여럿이 바다로 낀 교회의 문을 열었다.

2011년 새해 첫 주일예배. 청산등대교회의 좁은 예배당 안은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 할머니들은 “우리 목사하고 사모, 새해 복 많이 받아라”며 덕담했다. 준비 찬송을 시작하자 할머니들은 몸을 좌우로 흔들어 박자를 맞췄다. 찬송가 193장 ‘예수 십자가의 흘린 피로써’ 전주가 흘러나왔을 때 김영분(80) 할머니가 “내가 젤로 좋아하는 노래여”라며 힘차게 박수를 쳤다.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퍼졌다.

예배 방식도 남달랐다. ‘쌍방향 소통 예배’라고나 할까. 이날 말씀인 잠언 16장 8~10절을 봉독하려 하자 한 할머니가 큰소리로 “일루 와서 좀 찾아봐라!”며 외쳤다. 교회 안은 또다시 웃음바다가 됐다.

성도 8명에 불과한 작은 섬 교회지만 이 곳 노인에겐 소중한 공간이다. 즐겁고 편안한 안식처. 등대교회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바닷가 교회, 노인의 쉼터가 되다
1995년 9월 15일. 전남 완도군 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한 배가 청산도에 도착했다. 임종광(53) 목사부부와 두 아들의 양 손엔 짐이 가득했다.

섬 남동쪽 구석진 곳에서 조그만 교회를 발견했다. 옥상에 솟아 있던 붉은 십자가 불빛은 수명이 다했는지 흐릿했다. 할머니 한 분이 예배당에 앉아 목사 가족을 기다렸다. 임 목사 가족이 교회에 도착하자 말없이 열쇠 하나를 주고는 사라졌다. 이후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은 임 목사 가족 4명. 그뿐이었다. 이는 3년간이나 이어졌다.

사람을 끌어모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섬사람들이라 배타적 성향이 강해서인지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서울토박이로 그 지역 방언을 몰랐던 김숙(47) 사모의 고충은 더했다. “서울 살지 무엇 하러 여기까지 왔느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교회 집기는 부서지기 일쑤였고 교회 행사를 할 때 방해도 극심했다.

하지만 임 목사 가족은 포기하지 않았다. 일일이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야쿠르트를 함께 마시며 노인들의 인생얘기를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임 목사는 동네에 살던 젊은이 김현배씨가 방에 힘없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보게, 일어나게!” 부리나케 병원으로 향했다. 안타깝게도 김씨는 몸 반쪽을 쓰지 못하는 신세였다.

돈이 없어 병원에 입원할 수 없었던 김씨에게 등대교회는 병원이자 휴식처였다. 임 목사 가족은 수발을 자청했다. 밥을 먹이고, 변을 받고, 몸을 씻겼다. ‘그놈아가 등대교회에서 지내면서 병이 호전됐다.’ 주민들의 입에 등대교회가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배타적이었던 노인들 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등대교회는 마을 사람의 쉼터로 시나브로 자리 잡았다.

98년 새해 첫 주일, 3명의 할머니가 교회 문을 두드렸다. 가족 이외에 첫 교인이었다. 할머니들은 입을 모아 물었다. “우리 죽으면 거시기 장례는 치러 줄 텐가?”

오랜 정성, 조금씩 마음을 얻다
이날 새해 첫 주일예배에도 등대교회엔 새 얼굴이 등장했다. 분홍색 겉옷으로 한껏 멋을 낸 할머니 한 분이 발을 들였다. 이영진(78) 할머니. 예배당 뒤쪽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찬송가를 따라 불렀다. 그가 등대교회의 문을 연 것은 ‘사랑의 반찬’ 때문이었다.

김 사모의 음식 솜씨는 매우 훌륭하다. 임 목사와 전도를 다니면서 사모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했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다. 반찬이었다. 홀로 사느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노인에게 사랑의 반찬을 만들어 드리자는 것이었다. 처음엔 어르신의 입맛을 맞추지 못해 혼쭐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사모의 정성을 알게 된 노인들은 반찬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예배를 마친 뒤 간이 교회식당에 나이든 교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김풍례(80) 할머니는 “사모가 서울에서 와서 음식이나 할랑가 했두만 아주 맛있어. 다음엔 나물을 좀 무쳐 달라 해야것어”라고 말하며 “오늘은 음식이 뭐냐”고 물었다. “잔치국수예요”라고 김 사모가 답하자 할머니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잉, 그려?”

김 사모가 살짝 귀띔했다. “어르신들은 퍽퍽하다고 돼지고기와 닭고기는 드시지 않아요. 소고기는 비싸서 해 드리기가 부담스럽고. 오리고기를 할머니들이 가장 좋아하시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죠.”

임 목사가 “입맛이 엄청나게 까다로워브러”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동그랑땡, 두부 무침, 생선가스에 할머니들의 젓가락이 계속 왔다갔다했다. 할머니들은 “이왕이면 국수 같은 거 말고 고기 같은 거 내오라”면서도 맛있는 듯 국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이들 대부분은 사랑의 반찬으로 등대교회의 친구가 됐다. 몇몇 할머니들은 반찬이 떨어지면 평일이든 주일이든 할 것 없이 교회를 찾는다. 목사 가족,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재밌게 시간을 보낸 뒤 냉장고에 있는 음식과 반찬을 가져간다. “반찬 떨어졌다.” 이 한 마디면 족하다.

반찬을 만드는 김 사모는 인기 최고다. 섬 생활이 어렵지 않냐고 묻자 뜻밖의 답변이 나왔다. “결혼 전 부흥회에서 목사님이 ‘농어촌에서 목회할 사람 손들라’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어요. 그 이후 농어촌 목회를 할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김 사모는 청산도에 들어온 이후 임 목사에게 단 한 번도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다. “남편 때문에 제가 들어온 게 아니라 제 기도 때문에 남편이 여기 들어온 거니까요.”

임 목사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생 처음 듣는 얘기지라. 아내 때문에 여기 와 있는 것이었구먼?” 너털웃음을 지었다.

소망을 가지다
예배가 끝나고 몸이 불편해 보이는 한 할머니를 임 목사가 차로 모셨다. 차일엽(96) 할머니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많아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날 서울에 사는 차 할머니의 딸이 임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신데 가기 어려우니 목사님이 병원으로 모셔주시겠습니까.” 임 목사는 완도의 한 병원에 할머니를 입원시켰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사람. 바로 등대교회 임 목사였다. “도움이 되는 한 무엇이든 합니다.”

임 목사 부부의 새해 소망은 하나다. 캄캄한 바다에서 길을 안내하는 등대처럼 사람의 영혼을 밝혀 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을 감당하고 싶은 바람이다.

“젊은이들도 교회를 쉼터로 이용합니다. 이 동네에 식당도 없고 잘 곳도 마땅치 않거든요. 지나가다 교회 팻말을 보고 들어와서 밥도 먹고, 화장실도 이용하고, 잠도 자고…. 모든 사람이 부담 없이 쉬다 갈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합니다.”

임 목사는 덧붙였다. “교회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도 믿고 들어오더군요. 한 번은 스님이 ‘나무아미타불, 화장실 좀 쓰겠습니다’ 하시기에 ‘할렐루야, 마음껏 사용하십시오’ 하고는 서로 바라보며 웃은 적도 있었습니다.”

일할 수 있는 믿음의 동반자를 찾는 일도 시급해 보였다. 지금 당장은 진산리와 국화리의 노인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청산도 전체를 위해 일을 하고 싶어 했다.

“16년 전 처음 섬에 들어오면서 했던 기도를 잊지 않습니다. ‘이 섬을 하나님의 섬으로 만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하나님께서 기도를 이뤄주시는 날까지 뛸 겁니다.”

완도=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조국현 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