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수지 (9) “왜 B학점이죠?” “자전거를 못 타잖아”
입력 2011-01-05 17:47
이화여대 입학식을 마친 뒤 대강당에서 영문과를 제외한 모든 신입생들이 영어시험을 봤다. 나는 이 시험에서 1등을 한 덕분에 학교 추천으로 사회사업연구회에서 매달 생활비와 학비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4·19 혁명이 일어나며 이 장학금이 중단됐고, 대신 8월부터는 한미재단을 통해 간호학과, 의학과, 수의과 학생에게만 지급하는 파일럿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여성단체의 장학금을 받게 됐다. 졸업할 때까지 이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고, 가정교사를 하면서 번 돈은 집에 생활비로 드렸다.
어느 날 보건간호학을 가르치시던 교수님이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병이 나도 병원에 가기 어려우니 무엇보다도 병이 나지 않도록 예방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그러면서 내게 ‘재건대’란 곳을 소개해 주셨다.
서울 중구에 있는 재건대는 넝마주이로 먹고사는 사람들을 재활시키는 곳이었다. 당시 그곳에는 성병 환자를 비롯해 우범자들이 많아 내무부에서 특별 관리하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남자들뿐인 그곳에 가서 보건간호학 시간에 배운 성병이나 보건위생에 대해 강의를 했다. 사실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남자들이 성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 주사도 놔줬다. 19세 여대생이 아저씨들에게 성병 교육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겁도 없이 참 당찼던 것 같다.
대학 2학년 겨울방학 때, 병원에서 4주간 실습을 하면서 간호사로서의 적성을 테스트하게 됐다. 실습을 시작하던 날, 처음으로 들어갔던 ‘이대병원 104호실’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약을 들고 병실에 들어서자 환자가 내게 물었다.
“학생 이름이 뭐지?”
약에 대한 것은 열심히 준비했는데 갑자기 내 이름을 묻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진 채 약만 주고 허겁지겁 나왔다.
“어허, 자기 이름도 모르는 학생이 있네.”
척추마비 장기 환자였던 그분이 내 뒤에서 큰 소리로 웃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나를 보고 수간호사가 물었다.
“김수지 학생,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간호사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내 이름이 생각나는 게 아닌가! 다시 104호 병실로 되돌아가 말했다.
“제 이름은 김수지예요.”
환자가 다시 껄껄 웃으며 말했다.
“어, 수지라고? 수지맞는 수지구먼!”
이후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수지맞는 수지’라고 말하곤 한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병원 측에 가슴에 이름표를 달자고 제안을 했고, 그 제안대로 이름표를 달고 병실에 들어갔다.
3학년 전공실습을 위해 원주기독병원, 원자력병원, 한일병원 등 여러 병원을 계속 돌아다녔다. 한 학기 실습을 마치고 성적표가 나왔다. 다른 과목은 모두 A학점인데 정작 보건간호실습만 B학점이 나왔다.
‘이상하다. 환자들에게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는데….’
천직이라 생각하고 택한 길인데 실습에서 B학점이 나오니 여간 속상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어 담당인 손경춘 교수님을 찾아갔다. 교수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너는 자전거를 못 타잖아.”
당시 농촌의 보건소에서 근무하려면 환자 방문을 위해 자전거를 탈 줄 알아야 했다. 교수님도 학생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라고 권했다. 나도 몇 번 시도를 해봤는데 이상하게 잘 되지 않았고, 번번이 넘어져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내게는 자전거 타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