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곡의 콥틱교회 1900년史… 신년예배 폭탄 테러로 재조명
입력 2011-01-04 18:07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한 콥틱교회 폭탄 테러로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1900년 콥틱교회의 질곡의 역사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교회사아카데미 대표 라은성 목사는 “콥틱교회 역사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었다”며 “교회 시작 때부터 이집트 문화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4∼5세기에는 유대파와 이교도, 기독교도와 싸웠다”고 말했다.
라 목사에 따르면 콥틱교회는 칼케돈공의회(451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중시하는 신학노선을 택하면서 독자적인 교리를 이어왔다. 이 때문에 동·서방 교회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서자’로서의 설움을 삼키며 살아야 했다. 교회사가들은 칼케돈공의회에서 콥틱교회가 채택한 신학은 예수의 인성 부인이 아니라 인성을 더 거룩하게 보려는 시도였다고 해석한다.
콥트(Copt)는 이집트에 살던 원주민으로, 1세기 중엽 마가의 선교에서 콥틱교회가 시작됐다. 이후 사막의 수도사들에 의해 수도원 운동이 퍼졌고 아타나시우스와 같은 걸출한 지도자를 배출했다. 알렉산드리아는 3∼4세기 교회의 스승들이 활동했던 곳이다. 그리스 출신 클레멘트와 그의 제자 오리겐 등이 대표적 학자였다.
콥틱교회는 비잔틴(동로마)제국 지배 속에서도 고난을 받았다. 황제의 지명을 받은 멜카이트 대주교는 콥틱교회를 이단으로 취급, 신자들을 대량 학살했다. 분열을 거듭하던 콥틱교회는 642년 이슬람의 침공을 받으면서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이집트는 12세기 말까지 거의 이슬람화됐다. 콥틱 신자들에게 부과하던 ‘지즈야’라는 세금제도는 1885년까지 이어졌을 정도로 이들을 괴롭혔다. 고난은 최근까지 이어져 이슬람 극단주의의 발흥으로 콥틱 신자들은 타깃이 됐다.
‘2010 세계기도정보’의 편집자 제이슨 맨드릭은 “이집트 교회는 2000년간 차별 속에서 신앙을 유지했다”며 “고난의 역사는 ‘순교자의 교회’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평했다. 콥틱교회의 공식 명칭은 이집트정교회(the Egyptian Orthodox Church)이다. 정교회(正敎會)란 니케아공의회(325)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 에베소회의(431) 칼케돈공의회 등 1∼7차에 걸친 종교회의만 정통으로 인정하는 교회다. 지금은 셰누다 3세가 교황이며 정교회의 예배 형식을 따른다. 1200만명의 신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