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교회는 무엇인가

입력 2011-01-03 17:58


(26) 성서의 교회 이미지 ‘新婦’

교회의 이미지로 건물과 몸이 외적인 것을 나타냈다면 신부는 교회의 내적인 면을 나타낸다. 곧 신랑 되신 주님에 대한 교회의 신부로서의 사랑의 관계를 나타낸다. 여기서는 아내가 아니고 신부이다. 신부는 첫사랑과 순결과 기대와 황홀에 벅찬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런 모습을 교회는 언제나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이미지의 교훈이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부부관계로 묘사된 것이 많다. 특히 호세아서나 아가서가 그렇다. 다른 예언자들도 신부의 정절을 잃은 것을 음란이요 우상숭배로 보고 있다.

이 이미지는 우선 신랑의 끝없는 성실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고 바알에게 간 부정의 이스라엘을 끝까지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눈물겨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호세아서의 이 구절은 18, 19세기 설교의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 세계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교회를 절대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설교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 신부의 관계로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이 보잘것없고 불성실한 아내를 위하여 몸을 버리시면서까지 사랑하신다는 메시지이다. 그것을 바울 자신 뼈아프게 체험하고 있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남편 된 자들과 아내 된 자들에게 권고한 말은 다 이런 체험에서 나온 충정이었다.

요한계시록에는 교회가 우리 주님과 혼인한 사이로서 몸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정결과 사랑을 지키다가 종말의 날에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난다는 감격과 환호가 울리고 있다.

이런 전통은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에게서 강렬하게 그리고 거의 로맨틱하게 표현되고 있었다. 중세의 버나드나 아빌라의 테레사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절절하게 표현했던 절세의 신비주의자였다. 이용도 목사도 오해 받을 정도의 부부지간 애정으로 끓어오르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가슴 설레게 표현하고 있었다. 고난당하신 주님에 대한 사랑은 눈물겹고 통렬할 수밖에 없었다. 한계가 있는 사람의 언어로 그리스도에 대한 사무치는 사랑을 쓰자니 그런 말들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부로서의 교회의 이미지는, 그것이 개인이든지 개교회든지 혹은 교파든지 세계교회든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이며 흥분되는 일인가를 말하여 주는 상징이다. 따라서 이 신부의 이미지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순수한 신부처럼 언제나 맑고 깨끗하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는 정결로 주님 앞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비유이다. 이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이미지는 우리 기독교의 충성과 순결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민경배 백석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