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83)
입력 2011-01-03 10:10
Feel the pull !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정벌하려고 갔다가(BC 334) 벌거벗은 성자 ‘단다미스’를 만납니다. 대왕이 성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습니까?” 그러자 성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더가 다시 물었습니다. “나는 신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신을 보지 않고도 어떻게 그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습니까?”
단다미스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알렉산더의 손을 잡아 어디론가 이끌었습니다. 알렉산더는 단다미스라는 성자를 따라 가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마도 이 사람이 나를 어딘가 데리고 가서 신을 보여줄 모양이다’ 했습니다.
얼마를 가다보니 어린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이 하늘 높이 올라간 까닭에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단다미스가 연을 날리는 아이의 곁에 서더니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연이 어디 있느냐?” 그러자 아이가 말했습니다. “하늘에 있습니다.” “내 눈에는 연이 보이지 않는데 너는 연이 하늘에 있다고 하느냐?” 그때 아이가 대답하기를, “물론 저도 연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그 연이 나를 끌어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I can feel pull of it-” 단다미스가 아이의 말을 듣고서 알렉산더에게 말했습니다. “나도 신을 보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나는 항상 신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음을 느끼오.”
여러분!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는 것 -feel the pull-’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를, 나의 삶을, 나의 생을, 나의 하루하루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의 실체를 보지 못합니다.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Pull], ‘끌어당김’의 손길을 느끼면 보지 않고도 실체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실체’가 바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면 족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리나 신조나 학습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늘 높이 올라간 연을 느끼는 것은 온 몸이지 다른 어떤 이론이나 이성이 아니지 않습니까?
늙은 성자 단다미스는 웃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속으로 깨닫기를, ‘아 이것이었구나! 아, 그렇구나! 이게 곧 계시라는 거로구나!’하면서 돌아서려고 했습니다. 그때 단다미스가 단호하게 알렉산더를 돌이켜 세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당신이 아이의 말을 듣고 이해했다고 되는 게 아니오. 당신 스스로 이 줄을 잡고 ‘-feel the pull-’ 그 끌어당기는 힘을 직접 느껴 보시오.”
만일에 알렉산더가 단지 그 소년의 말을 듣고 가버렸다면,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신조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의 교리를 암송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직접 연줄을 손에 쥐고 그 [Pull]을 느끼고 체험했습니다. 연은 저쪽 끝 하늘에 떠 있고, 그 ‘끌어당기는 힘’은 이쪽 끝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 한 해 어떠셨습니까? 수많은 사건 속에서 그 ‘힘’, ‘feel the pull 끌어당기는 힘’을 느끼셨습니까? 새해의 다짐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을, 내 삶을, 내 전부를 끌어당기는 그 ‘힘’을 느끼며 살겠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하시니라.”(요 20:29)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