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유병규] 믿음의 경제
입력 2011-01-02 17:51
새해는 21세기 두번째 10년이 시작하는 첫해다. 지난 10년을 돌아보고 새로운 10년을 준비하는 의미있는 해다. 한국 경제의 이전 10년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과거 20세기 말에 발생한 국내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21세기 초의 세계 금융위기마저 겪어야 했다. 다행히 한국 경제는 두 세기에 걸친 경제위기를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극복해 왔다. 경제 외형상으로 한국 국내총생산(GDP)과 무역 규모는 2011년에 모두 1조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GDP는 세계 13위권에 달하고 무역액은 세계 순위가 한 자릿수가 될 공산이 크다.
세계에서 수출입액이 1조 달러가 넘어선 국가는 역사상 8개 나라뿐이다. 국토 면적과 인구가 각각 세계 전체의 0.07%와 0.75%에 불과한 작은 나라의 경제 실적으로서는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경제 규모의 괄목할 만한 확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아직까지 선진 경제국이라는 평가는 얻지 못한다. 여전히 1인당 국민소득 수준이나 경제 제도와 관행 면에서 선진국과는 큰 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앞으로 10년 동안 성취해야 할 핵심 과제가 바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이다. 한국이 선진경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가장 역점을 둬야 할 부문이 사회적 자본의 확충이다. 노동과 재화의 대량 투입을 통한 국내 경제의 양적 성장은 이미 한계에 봉착했다. 선진국은 경제 덩치만 키운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어간다고 해서 중동 국가들을 결코 선진국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존경받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신체의 성장과 함께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야 하는 것처럼, 선진국도 경제 규모의 확대와 함께 경제 운영 시스템이 혁신되어야 한다.
한국 경제가 앞으로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얻을 뿐만 아니라, 제도의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사회적 자본이다. 이는 동일한 양과 질의 노동이나 자본을 투입해도 성과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사회 내 존재하는 무형자산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서로 믿는 신뢰다. 신뢰는 상호이익을 위한 협력과 조정을 원활하게 하여 거래비용을 대폭 줄이고 경제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크게 높여준다. 세계은행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자연자원보다 이 같은 무형자본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한국의 신뢰 수준은 선진국에 진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세계적 저술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명저 ‘트러스트’에서 한국을 저신뢰 국가로 규정했다. 최근의 조사에서도 한국의 신뢰지수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내 국가 중에 최하위권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도는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후발개도국들보다도 낮은 상태다. 서로 간의 믿음이 없이는 한국 경제의 선진화 꿈은 이룰 수가 없다.
한국이 신뢰 사회가 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광우병을 둘러싼 촛불 집회, 가수 타블로의 학력에 대한 끊임없는 의혹 제기 등은 한국의 불신풍조를 나타내주는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지난해 말 건설기업 M&A 과정이 정상 궤도를 벗어나게 된 것도 의도적인 의심이 확산된 데 따른 것이다. 의혹이 난무하는 것은 공권력을 경시하고 법과 원칙과 규정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건설기업 M&A의 혼선 과정을 보면 시장의 정상적인 제도와 관행을 뛰어넘는 힘의 논리가 학계, 관계마저 불신을 키우고 확산시키는 데 동원되고 있는 느낌이다.
뉴욕의 전문 보석상들은 계약서나 각서 없이 거래를 한다. 상호 신뢰를 중시하고 거래 관행을 위반할 경우 제명을 당하는 까닭이다. 믿음은 손해를 보더라도 주어진 제도와 법, 규정을 믿고 따르는 데서 싹트고 자란다. 한국 사회에서 ‘게임이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라는 자조와 탄식이 이어진다면 믿음의 경제는 요원하다. 새해는 힘 있는 계층이 주어진 원칙과 규정을 먼저 준수함으로써 경제 선진화를 위한 믿음의 씨를 뿌리는 해가 되었으면 한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경제연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