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1-01-02 19:38
(27) 예배자이소서!
마가복음이 가리키는 예수의 길을 따라가면서 기독교 신앙의 심장을 붙잡는 느낌이다. 나는 신앙이란 게 어떤 식으로든 내 삶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정신적인 존재임은 내게 명확했다. 대학교 때 철저한 무신론자며 유물론자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와 치열하게 토론한 생각이 난다.
나는 인간 정신의 고귀함과 이를 토대로 형성되고 이어지는 인류 문화의 위대함을 확신을 갖고 주장했다. 그때 나는 기독교 신앙인은 아니었지만 ‘사람다움’이 ‘자연(自然)스러움’보다 더 우위에 있고 고귀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서양철학을 강의하는 교수님이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을 중심으로 사람다움에 대해 강의하셨다. 사람다움과 자유의지의 관계, 이를 확신하는 문화 문명사의 흐름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을 얘기하셨는데 큰 감명을 받았다. 내 인생관의 기초가 된 가장 큰 몇 가지 중 하나였다.
신앙이란 게 마음과 정신에,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신체와 삶의 현실에 유익하다는 건 아주 분명했다. 그런 내 생각을 말했을 때 신학자 선배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삼청동 북카페에서였다. “그럴까….”
선배는 얼마간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선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커피면 으레 ‘라떼’를 마시는 선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도 조금 더 생각했다. 뭐, 선배가 말하는 스타일이 늘 그렇기는 했다. ‘신앙이 사람에게 이익이다’는 명제에 대해 선배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게 확실하다. 자기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뜸을 들이는 게 아닌 것도 분명하다. 다만 나한테 그걸 어떻게 설명해 줄까 적절한 표현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음…. 이렇게 생각해 보자. 너 결혼했잖아. 그런데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이익이 날 것 같아서 제수씨와 결혼한 거냐? 물론, 이익이란 개념을 아주 넓게 생각하면 결혼이 이익이긴 하지. 그런데 우리가 보통 이익이란 말을 쓸 때는 경제적 이득 같은 걸 생각하잖아. 네가 결혼한 게 그런 이익 때문은 아니지. 어떻게 보면 결혼은 도리어 자기를 희생해야 하는 것도 적지 않아. 내가 지금 신앙과 이익이란 주제를 설명하면서 결혼을 끌어들이는 건 성경의 방식이기도 해…. 얘기를 계속하면, 결혼 생활이 진짜 행복하려면 남편과 아내가 이익을 얻겠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하는 거야. 저 사람이 날 위해 무얼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저 사람을 위해 뭘 해줘야 할까 생각하면 되는 거지. 신앙도 그런 거야. 신앙이 나한테 또는 하나님이 나한테 어떤 이익이 될까 재는 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께 무얼 드려야 하는가 생각하는 거야.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되는 건 아니야. 난 지금 신앙의 본질을 얘기하고 있는 거야. 오늘날 많은 신앙인이 이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봐. 엄격하게 말하면 이 점에서 신앙과 비신앙이 갈라진다고 할 수 있어.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서 정점이 바로 예배야….”
얘기를 하면서 선배의 눈매가 더 깊어졌다. 그 깊은 곳에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이 예배드리는 집이라고 선언하시는 장면을 읽으면서 선배가 떠올랐다. 그날 선배와 찻집을 나와 어느 작은 교회당에 들어가 잠시 앉았다. 선배가 기도하자고 하더니 한동안 침묵한 뒤에 짤막하게 기도했다. “주여, 한국 교회가 예배자이게 하소서! 한국 교회여, 예배자이소서!”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