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수지 (6) “도둑질만 빼고 다 배워야 한단다”
입력 2011-01-02 17:54
그런데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운동회 하루 전날 오후에 밥을 하려고 집으로 뛰어가고 있는데 머리에 무언가를 이고 가던 한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하나꼬’의 집이 어디냐는 것이었다. 당시 나의 일본 이름이 하나꼬였다.
“하나꼬는 전데요.” “집에 엄마 계시니?” “아니요.”
부인은 머리에 이고 있던 보따리를 가리키며 “그래, 아무튼 이건 네 앞으로 온 거니까 네가 가져 가거라” 하고는 집 앞에서 내려 줬다. 집에 들어와서 보자기를 펴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레이스가 달린 흰 원피스, 흰 스타킹, 흰 샌들…. 바로 내가 간절히 원하던 것들이 아닌가! 그 선물은 일본에 살고 있는 외삼촌이 보낸 것이었다.
일찍이 외가가 있는 섬을 떠나 우리 집에 기거하며 중학교에 다니던 외삼촌은 여수순천사건 때 좌익 학생들에게 거의 죽을 정도로 몰매를 맞았다. 이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외할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게 될까 봐 외삼촌을 아예 일본으로 밀항시켰다. 외삼촌은 일본에서 공부하며 밀항선을 타고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 이따금 소식을 전해오곤 했다. 그 외삼촌이 내게 선물을 보낸 것이다.
드디어 운동회 날이 됐다. 가장행렬에서는 내가 단연코 주인공이었다. 당시 시골에서는 무명옷만 입어도 과분한 옷차림이었는데, 레이스가 달린 흰 원피스를 입고 흰 스타킹에 흰 구두까지 신었으니 눈에 띄는 건 당연했다. 가장 멋있고 예쁜 간호사 역할을 했다. 아이들이 나만 따라다녔다. 어린 나에게 간호사는 다시 한번 ‘아름다운 사람’으로 강하게 각인됐다.
그 뒤 나는 후송병원을 들락거리며 간호사에 대한 꿈을 구체적으로 키워나갔다. 당시 각 지역마다 6·25 전쟁 때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던 후송병원이 있었는데,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매일 병원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부상병들의 위문편지 답장도 써주고, 담배 심부름도 하고, 드레싱 카트도 끌어주고, 주전자에 물을 떠다주는 등 잔심부름을 했다.
언제부턴가 병원에 가면 사람들이 나를 ‘꼬마 간호사’라고 불렀다. 정말 간호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간호사들이 하는 일이 너무 훌륭해 보이고 부러웠다.
‘나는 커서 꼭 간호사가 될 거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수여중에 들어갔다. 입학 후 첫 번째 치른 모의고사 성적에 따라 앞자리부터 앉았는데 나는 7등이라 맨 뒤에 앉게 됐다. 그런데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내가 눈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여수에는 안경점이 없어서 안경을 맞추러 배를 타고 부산까지 갔다. 안경을 끼고 보니 세상이 달라보였다. 밤배를 타고 돌아오는데 너무 황홀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배 뒷머리에 이는 흰 거품과 불빛이 너무 아름다웠다.
여수에서 안경을 낀 여학생은 나밖에 없었다. 내가 지나가면 아이들이 신기한 듯 따라왔다. 어떤 때는 “안경쟁이 간다”며 놀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전혀 놀림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다. 앞이 또렷하게 보인다는 것이 그토록 신날 수가 없었다.
“도둑질만 빼고 다 배워야 한다.”
엄마는 내개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릴 때부터 이 말을 듣고 자란 나는 항상 뭐든지 배우려고 했다. 그중에서도 영어 공부에 특히 힘을 쏟았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