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시대 인생 3막이 바뀐다] 마음껏 뛰고픈 인생 후반전… “곡괭이질이 즐거워요”
입력 2010-12-31 17:06
脫서울 2년 귀농인 석종태씨 부부
지난 27일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귀래3리 정수농원.
인기척을 내자 이른 아침부터 농원 내 야산에서 자갈을 골라내던 석종태(65)씨가 곡괭이를 내려놓고 반갑게 맞아줬다. ‘서울시민’이라는 이름표를 뗀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긴 장화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구릿빛 피부가 영락없는 촌 농부였다.
2008년 12월 서울을 떠나 고향에 정착한 그는 3966㎡(1200평)의 밭에 옥수수, 고추, 콩, 배추를 심어 내다팔고 있다. 임야 9917㎡(3000평)에는 감나무와 매실나무를 심고 있다. 토종닭도 기른다. 모든 작업을 혼자서 하는 석씨는 농사철에는 쉴 날이 없다. 그는 최근 귀래권역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사무장까지 맡았다.
석씨는 잘나가던 기업인 출신이다. 충주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8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그는 ㈜금성사(현 LG전자)를 거쳐 80년 한라그룹 이사를 지냈다. 12년 만에 직원에서 임원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85년 퇴직 후에는 청라건설㈜과 파로스 컨설팅을 세웠다. 2008년 12월 귀농 전까지 42년 동안 도시민 모두가 바라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도 있다. 그는 “현대건설 재직 시 이 대통령이 서빙고 중장비 수리공장 대리로 근무했다”며 “이후 한라그룹으로 옮겨와 이사로 일할 때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이 대통령과 협상 테이블에서 여러 차례 설전을 벌였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기업인으로 잔뼈가 굵은 덕분에 그는 귀농하자마자 마을 최대 근심거리였던 석산개발 업체와의 보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처럼 성공가도를 달렸던 석씨가 두메산골에서 농사꾼이 된 이유는 뭘까. 그는 은퇴 후 밀려든 도시생활에 대한 회의와 자괴감 때문이라고 했다. 회사 퇴직 후 대표이사로 일하며 겪었던 사업가로서의 힘겨운 삶도 귀농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석씨는 “젊은 시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렸다”며 “은퇴하고 나서야 작은 성공에 도취돼 자만감에 빠져 살았던 모습이 보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도시에 사는 많은 은퇴자들이 특별한 일거리 없이 TV시청이나 등산, 바둑, 골프 등 취미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나 역시 무미건조한 삶을 살다 고심 끝에 농촌생활을 결심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인터뷰 도중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큰아들(37)을 돌보기 위해 서울에 갔던 아내 이정수(60)씨가 온 것이다. 이씨는 보름씩 서울과 원주를 오가며 살고 있다. 경기여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한 이씨는 농장이 자랑하는 고급인력이다. 사장이자 일꾼인 남편은 아내를 ‘마케팅 팀장’이라 부른다. 이씨는 서울에 있을 때면 남편이 키운 농작물을 팔기 위해 각종 모임에 나간다. 아내 덕분에 석씨는 지난해 재배한 농작물을 모두 직거래로 팔 수 있었다. 이씨는 “남편이 고향에 가서 농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정말 농촌에 와서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반강제로 따라와 일도 거들고 영업까지 하는데 마케팅 팀장에 대한 대우가 너무 소홀해 사표를 낼까 생각 중”이라고 애교 섞인 농담을 건넸다.
부부가 귀농에 이르기까지는 2년 6개월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 땅과 농사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귀농 후 해야 할 일을 계획하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 6개월은 농사를 짓기 전 경지를 개간하고 낡은 고향집을 수리하는 데 투자했다. 부부는 “귀농에 성공하려면 목적과 계획이 분명해야 한다”며 “그림 같은 전원주택을 짓고 여유롭고 노년을 보내겠다는 환상은 버려야한다”고 조언했다. 또 “자신이 과거에 무엇이었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야 한다”며 “동네에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서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주민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다”고 충고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도시생활과는 달리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함도 필수하라고 주문했다.
석씨는 새해에는 된장과 김치 제조를 위한 발효공장을 짓는 소망을 갖고 있다. 원주시에 사업계획서도 제출했다. 모두가 잘 사는 마을을 만들어 보겠다는 취지에서 주민 모두가 똘똘 뭉쳐 시작한 사업이다. 석씨는 “도시에서 인생 1모작을 했다면 평생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 농촌에서 2모작을 시작하는 것도 의미 있는 선택”이라며 “초기에 과도한 투자를 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도시에서보다 아름다운 인생을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원주=정동원 기자 cd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