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돌아가자] 붓글씨로 두번째 성경 필사 마친 안시보 집사
입력 2010-12-31 14:45
“아이고, 이건 둘이 들면 되레 허리 다쳐. 나 혼자 옮기는 게 편해요.”
새해를 사흘 앞두고 서울 연지동 연동교회에서 만난 안시보(74·여) 집사는 작은 손수레에 싣고 온 사과상자만한 꾸러미를 번쩍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놨다. 보자기를 풀어 꺼낸 것은 성경 한 권. 검은 가죽 표지에 ‘개역개정판 성경전서’라고 금박으로 새겨진, ‘걸리버의 여행’ 속 거인에게 딱 어울릴 성경이었다.
가로 44㎝, 세로 56㎝, 높이 24.5㎝, 무게 20㎏. 송아지 가죽으로 장정한 이 성경은 안 집사가 대한기독교서회 2006년 11월 초판 발행 개역개정판을 필사한 것이다.
크기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내용이다. 구약 1330쪽과 신약 422쪽, 목차와 주기도문 사도신경까지 포함한 성경 전체를 그대로 옮긴 것도 놀랍지만 창호지에 붓글씨로 깨끗하고 정갈하게 쓴 한 줄 한 줄, 한 치의 오차나 이지러짐이 없는 줄 간격과 여백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니, 이걸 얼마나 걸려서 쓰셨대?” “줄이 어떻게 이리 반듯반듯하지?” “본래 서예를 하셨나봐?”
기자가 질문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 둘 모여들어 구경하던 이 교회 집사 권사들이 궁금증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앞뒤로 한 장 쓰는 데 3시간 걸려요. 새벽 4시 반에 시작해서 아침 식사 전까지 한 장씩 쓰곤 했지요. 도무지 펜 놓기 싫으면 한 장 반도 썼고. 한 번은 꼬박 9시간 걸려 세 장을 썼는데 병이 나서 3개월을 쉬었지 뭐야. 누워 있는데 하나님께서 ‘야, 욕심 부릴 데다 부려라’ 하시더라고요.”
이 성경은 원본과 쪽수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한 글자도 앞이나 뒷장으로 넘기지 않았다고. 혹시라도 나중에 글씨를 못 알아보게 되면 원본과 맞춰봐야 하기 때문이란다.
거기다 붓글씨에 어울리도록 2단 가로쓰기 성경을 3단 세로쓰기로 고쳐 쓰느라 계산기를 두들겨가며 줄과 글자 간격을 조정했다. 장정할 때 잘려 나갈 여백을 위아래 1.5㎝씩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컴퓨터가 알아서 조정해 주는 문서만 작성해 본 요즘 세대는 짐작도 못할 과정이다.
2007년 7월 7일 시작한 필사는 꼬박 3년1개월20일 만인 지난 8월 27일 끝났다. 여기 쓰인 붓펜만 900자루가 넘는다. 그리고 2개월간 제본과 장정을 거쳐 지난달 6일 완성됐다.
푸근한 인상의 안 집사는 성경 필사에 대한 질문에는 뭐든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질문에는 한사코 답을 피했다. “어차피 성령님이 붙들어줘야만 할 수 있는 일인데, 나 개인이 드러날 필요는 없다”는 이유였다. 안 집사의 성경 필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3년 1월부터 2006년 10월 말까지 필사한 첫 성경은 현재 연동교회 4층 역사관에 전시돼 있다.
처음 결심한 계기는 단순했다. “눈 밝을 때 크게 옮겨 써 놓으면 나중까지도 성경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창세기부터 시작해 2004년 초 사무엘상을 쓰고 있는데 연동교회에서 ‘110주년 기념 전교인 신약성경 옮겨쓰기’ 운동을 시작했다. 안 집사도 잠시 하던 작업을 내려놓고 여기 동참해 대학노트에 신약성경을 한 번 필사했다. 역시 붓펜을 사용했다. 좁은 노트 줄에 맞추느라 눈이 아팠지만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쓰는 보람과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 고집 덕에 서예수업 한 번 받은 적 없음에도 점점 더 아름다운 글씨체로 쓰게 된 것이기도 했다.
신약을 완서하고 자신감을 얻어 이전 작업으로 돌아갔지만 2006년 9월쯤, 큰 시험에 들었다. “요한계시록만 남기고 ‘아, 곧 끝나겠구나’ 했는데 그때부터 도대체 써도 써도 줄지 않는 거예요. 자꾸 틀려서 종이만 버리고. 그렇게 한 달 넘게 끙끙대고 겨우 끝냈어요. ‘하나님, 성경이 한 장만 더 있었어도 못 마칠 뻔했습니다’ 기도했다니까요.”
그 고생을 하고서도 두세 달 지나니 “내가 왜 이 귀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이후 서너 달간 서울 인사동과 동대문을 뒤져 좋은 창호지를 구한 뒤 다시 붓펜을 들었다. 이전 필사를 마친 지 7개월 만이었다.
성경을 쓰며 특별이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이 있는지 물었다. 안 집사는 뜻밖에 “그런 건 없어요”라고 했다. “어느 한 부분도 귀하지 않은 곳이 없었어요. 그저 그 말씀대로 실천하고 살지 못하는 게 송구스러울 뿐이지요.”
새롭게 도전하고픈 마음은 없을까? 안 집사는 고개를 저으며 “이제는 그동안 밑줄 쳐둔 부분별로 필사하면서 묵상하고픈 마음뿐”이라고 했다.
안 집사는 인터뷰를 마치고 “성경만 드러나게, 나는 안 드러나게 써 주세요”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하며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그리고 성경을 다시 고이 싸서 손수레에 싣고 눈 쌓인 길 위로 조심스레 끌고 갔다. 종이를 펴보니 아름다운 붓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모든 영광은 나를 필사할 수 있도록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이 모든 일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