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 가상 인터뷰-예수에게 길을 묻다

입력 2010-12-31 14:47


“목회가 고통? 나를 떠나 세상을 좇는게지 현대판 바리새인 득세하면 교회 역동성 잃어”

자신의 고향과 이웃, 가족에게 처음엔 인정받지 못했던 갈릴리 청년 예수. 인류 역사를 BC와 AD로 나눌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실로 놀라웠다. 그를 직접 만나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순교의 현장을 회피하지 않았다. 복음을 받아들인 지 120여년 만에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교회로 급성장한 한국 기독교가 요즘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수의 정신을 되살리는 것만이 급전직하의 한국 교회를 살릴 수 있다는 절규가 우리 주변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이에 본보는 예수 그리스도와 조규남(사진) 행복교회 목사 간 가상 인터뷰를 통해 이 시대를 향한 예수의 바람이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사람들이 묻곤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왜 목사가 되려 하는지, 장로나 집사로 주를 섬기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고요.



“각자의 은사가 다르네. 일단의 무리가 독립운동을 한다고 가정해볼까? 일부는 집과 일터에 남아 가족을 돌보면서 군자금을 마련하는 등 후방에서 든든한 지원 역할을 해야 하지. 물론 가족들을 뒤로 한 채 무장 투쟁의 선봉에 서야 할 사람도 많이 필요하네. 목사 선교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떻겠는가. 직분은 우열이 아니라 은사에 따른 분류일 뿐이네. 목사이기 때문에 나의 사랑을 더 받는 게 결코 아니라네.”

-주의 종이 될 것을 서원하고 신학교에 간 사람들 중 신앙이 흔들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요.

“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사용해 표현키 어려운 신앙을 학문적으로 정립해주고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해주는 것이 근본 취지네. 신학과 신앙의 관계를 이원론적이나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게. 둘의 관계는 조화와 균형을 통해 더욱 성숙한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데 있네. 만일 이 관계가 깨졌다면 신학교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든지, 본인이 갖고 있는 신앙에 문제가 있든지, 아니면 신학교와 본인 모두의 잘못일 수 있지.”

-주님의 가르침에서 이탈된 이단들이 우리들보다 더 열정적인 경우가 있는데요. 왜 진리가 아닌데도 그럴 수 있을까요.

“이단의 가르침에는 율법은 있으나 사랑이 없음을 알아야 하네. 심판은 있지만 긍휼과 은혜가 없다는 거지. 내가 십자가 보혈로 사람을 죄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했듯 자네들은 내 안에서 진정 피를 나눈 형제자매가 돼야 한다네. 그것은 나와 하나가 될 때만이 가능하네. 몇 가지 선한 행동을 했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야. 난 지상에 있을 때 결코 두 마음을 품지 않았네. 복잡한 논리를 펼치지도 않았어. 십자가의 길은 쉽지 않지. 그렇다고 마냥 복잡한 것도 아니네.”

-저는 선지자는 아니지만 불의를 볼 때 도저히 참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비판하고 정죄했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그러면 자네는 악한 것들이 이 사회를 죄로 물들도록 방치하겠다는 건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죄악들이 이 땅 위에 관영해도 침묵하겠다는 것인가.”

-누군가는 개혁을 부르짖어야 하지만 저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치라고 하십시오.

“죄 있는 자네보고 돌을 들어 치라 말하지 않았네. 그러나 내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들어 치려 하였던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누군가는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네. 그런 뒤 돌을 들든가 말든가 해야지. 자네는 알량한 양심을 들어 그 율법의 존재마저 무시하려 드는구먼.”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사울을 결코 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잖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의 부당성에 대해선 말했지. 그건 사울 왕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야. 사울 왕이 여호와의 진노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네. 최소한 이런 마음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왜 인생이 복잡하다고 생각하는가. 쉽게 살려고 하기 때문이지. 사울 왕은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마음으로 순종치 않고 자기 뜻을 세우려 했기 때문에 갈등과 번뇌로 복잡해진 거라네. 신앙생활의 기쁨도 빼앗겨 버리고 괜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간 거야.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묻게 될 질문은 매우 단순하네. 사는 동안 어떤 큰 업적을 이루었느냐를 묻지 않을 거네. 얼마나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애썼느냐네. 성경에 기록돼 있지.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저도 목회하기 힘듭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네. 내 말대로 하지 않고 자기 식대로만 목회하려는 자네를 내 종이라 세워 놓은 나의 고뇌는 어떠하겠는가. 평신도들은 좀 ‘맹한’ 구석이 있어 약간 칭찬만 해주면 쉽게 마음을 여는데…. 목회자나 신학생들은 참 ‘징글징글하게’ 말을 듣지 않아. 신앙생활은 매우 단순하네. 진리의 빛인 내가 친히 보여준 삶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을 좇아 자신의 생각과 뜻, 고집과 아집, 이기주의 등을 버리면 진정한 자유가 있게 되네.”

-주님의 겸손을 배우고 따라 가기가 어렵습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것 같은데요.

“자네 안에 숨어 있던 교만이 머리를 쳐들고 자네 목구멍까지 차오름을 감지하면 주위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게.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큰 업적을 세운 뒤 두려움으로 피하여 숨었던 그 동굴을 찾아가게. 아무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곳으로. 헨리 나우웬이 자신의 모든 명성을 내려놓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소외당한 이들의 모임 속으로 갔듯이. 그리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게.”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신앙이 더욱 뜨거워져야 할 텐데, 왜 식어가기만 할까요.

“좋은 질문이네. 2000년 전 내가 활동했던 그 시기에도 그랬네. 바리새인들이 그랬지. 그들은 회칠한 무덤같이 위선적인 신앙인이었다네. 사람은 한 가지 일을 반복적으로 오래 하다 보면 두 가지 현상에 직면하지. 첫째, 아주 능숙하고 쉽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네. 이때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달인’이라고 부르지. 긍정적인 변화야. 이런 일은 갈수록 신이 나며 더 높고 새로운 경지에 도전하며 상승세를 타게 되지. 둘째, 반복 중에 일 자체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의욕을 잃은 채 습관적으로 행하게 되지. 갈수록 능률과 효과가 떨어져 처음만 못하게 되지. 문제는 어떤 목적과 방법으로 그 일을 습관화시켜 나가느냐지. 적극적 능동적 긍정적 방향으로 습관화시킬 것인지, 소극적 수동적 부정적 방향으로 습관화시킬 것인지 선택에 달려 있네. 하나님과의 첫사랑에 대한 순결함과 신앙 본질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습관적으로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신앙의 형식화에 도달하면 현대판 바리새인이 되는 거야. 그때 교회는 생동감은 물론 역동력을 잃어버리게 되지.”

-그럼 저희들은 어찌 해야 됩니까.

“신앙생활의 습관화와 형식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네. 기도생활을 비롯한 주기적 예배 등 신앙행위는 하루 이틀 끝나고 말 일이 아니지. 내가 다시 오게 될 그날까지 습관화되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 자체가 무거운 짐이 돼. 경계해야 할 것은 습관화 뒤 따라오는 형식화야. 생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무늬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말게. 세상을 두려워 말아야 해. 세상은 내가 이미 이겼으니까.”

-현대인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닌데요. 십자가처럼 느껴질 정도인데요.

“스트레스와 십자가에 대한 재미있는 공식이 있네. 스트레스와 십자가의 공통점은 둘 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거지. 다른 점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법과 출처가 다르다는 거야. 스트레스는 거의 대부분 우리 안의 욕심에서 기인돼. 다른 사람과의 비교로부터 얻어지는 열등감,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했을 때의 상실감, 욕심을 빨리 채우고자 하는 조급함 등을 꼽을 수 있지. 스트레스를 이겨내려면 먼저 자신의 내면세계를 다스려야 하네. 방법은 아주 간단해. 욕심을 버리게. 십자가는 그것을 지기 전까지는 힘들게 생각되지만 막상 지고 나면 기쁨이 샘솟는 하나님의 능력이 공급되네. 내가 다시 올 그날까지 천국의 여정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자가 되게나. 그리고 천하에 천국의 소망을 전하게. 많은 이들이 땅의 것에만 집착하지. 멸망의 길인 줄도 모르고.”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