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최초의 한글성서, 이 땅 복음화 열정에 불 붙여
입력 2010-12-31 14:29
2011년은 한글로 완역된 최초의 성경이 출간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1882년 최초의 한글성서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가 존 로스 목사와 한국인들에 의해 만주에서 출간된 이후 30년 만에 신·구약을 합친 ‘셩경젼셔’(1911)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 역사와 성경의 출간은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한국교회의 성장 이면에 성경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한글성경의 번역과 보급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기 3년 전부터 백성들은 이미 성경을 갖고 있었다. 교회역사가들은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100년 먼저 전래됐지만 개신교보다 교세가 적은 것은 결정적으로 성경을 빨리 보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정도다.
‘로스역’이라 불리는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는 우리말 성경의 시초다. 이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였던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 조선인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이성하 등에 의해 제작됐다. 이들은 누가복음을 시작으로 1887년 최초의 신약성경인 ‘예수셩교젼셔’까지 완성하기에 이른다.
구약성경은 1911년 첫 출간됐다. 아펜젤러,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선교사가 번역위원으로 참여했고 한국인으로는 이창직과 김정삼이 가담했다. 특히 두 명의 한국인은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가 임명한 번역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선교사들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우리말 성경 번역에 참여했다.
3월에 ‘구약젼셔’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렸다. 6개월 만에 무려 6500권이 판매됐다. 그만큼 신자들은 성경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어 신구약을 합한 ‘셩경젼셔’가 5월에 출간되자 전국 교회는 이를 기념하는 감사예배를 드렸다. 영국에서 흠정역성경(KJV)이 출간된 지 300년째 되는 해였고 일제강점기의 핍박과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넉넉한 신앙의 근본이 됐다.
‘셩경젼셔’ 출간 이후 개역 작업도 계속됐다. 26년 레이놀즈와 피터스 선교사, 남궁혁 김관식 김인준 등이 개역위원으로 보충되면서 본격화됐다. 36년부터 1년 동안 구약과 신약의 개역이 완료됐다.
이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새로운 번역 성경이 나오지 못했다. 일제의 언어말살 정책으로 한글성경을 제작, 배포하던 영국성서공회가 탄압을 받았다. 일본 총독부는 38년 성서공회의 이름을 ‘조선성서공회’로 개명하고 41년 아예 일본인 손에 넘겨버렸다.
중단됐던 성경 발행이 다시 시작된 것은 해방을 맞으면서부터다. 조선성서공회는 48년 ‘대한성서공회’로 개칭한다. 독자적으로 성경 인쇄가 불가능해 대한성서공회는 미국과 영국, 일본의 인쇄소가 가지고 있던 ‘셩경개역’(1938)의 사진판을 인쇄하고 그것을 들여와 보급했다.
이후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1948)을 발표하자 새로운 맞춤법에 따라 성경을 출판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한성서공회는 즉시 성경 발행작업에 착수해 ‘셩경’은 ‘성경’으로, ‘창셰긔’는 ‘창세기’ 등으로 바꾼다.
그러나 출간을 앞두고 6·25전쟁이 터져 차질을 빚었다. 당시 대한성서공회 임영빈 총무는 공산군의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 성경 원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임 총무는 보관하고 있던 원고를 일본으로 가져가 미국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의 도움으로 성경을 출판했다. 52년 개역한글판 성경은 그렇게 빛을 봤다.
현재 한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전서 개역개정판’(1998)은 40여년 동안 예배용 성경으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던 개역한글판의 진일보된 판이다. ‘개역개정’은 이후 네 차례의 수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권의현 대한성서공회 총무는 “성경은 우리 민족의 삶과 연관성을 맺고 각 시대 속에서 변화를 이끈 원동력이 돼왔다”며 “서구 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말씀의 생명력을 전해주는 역할을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