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언론들, 한상만씨의 감동적 삶 소개… 전쟁고아→美 입양→사업가 성공→골수암→자선활동
입력 2010-12-30 18:41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사는 한상만(65)씨는 가끔 노트북에 저장된 북한 고아 소년의 사진을 보며 상념에 젖는다. 기억은 반세기를 거슬러 피란길에 부모를 놓치고 헤매는 소년을 떠올린다. 여섯 살 때의 한씨 자신이다.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 등 미 언론들이 미국으로 입양된 후 사업가로 성공했고, 노년에 재단을 설립해 탈북 고아 등을 돕는 한씨의 삶을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더욱이 그가 말기암과 싸우면서도 선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한씨가 LA 인근에 설립한 ‘한·슈나이더 국제어린이재단’은 북한뿐 아니라 캄보디아 탄자니아 등 빈국의 고아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한다. 지난해 3만4000달러를 모금해 14만4000개의 식량 패킷, 수천 달러의 기증 의류 등을 북한에 보냈다. 탄자니아 등에 학교 설립을 지원했다. 탈북 고아의 입양 허용을 요구하는 입법 청원 운동도 하고 있다.
재단 명칭은 한씨의 인생을 읽는 열쇠다. 당시 부모와 생이별 후 낯선 농가에서 길러졌던 그는 12세 때 의사가 되겠다며 무작정 상경했다. 어린 마음에 한 병원을 찾아 약제법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다. 그때 그를 유심히 지켜본 이가 있었다. 서울대 재건 지원을 위해 미네소타대에서 파견 나온 아서 슈나이더 교수였다. 그의 주선으로 한씨는 16세 때 미국으로 이민했다. 이후 슈나이더 교수는 독신 입양 금지법 개정까지 끌어내며 양아버지가 됐다.
성장해 무역업자로, 부동산사업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한씨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온 건 2002년이다. 골수암에 걸려 3∼5년밖에 살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걸 하자.” 양아버지가 자신에게 희망을 줬던 것처럼 외국 고아를 돕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는 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집과 가산을 처분해 이 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아직도 살아있다.
“그는 고통이 너무 심해 움직여선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활동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누구도 그 사실을 잊게 된다. 그게 그를 살아있게 하는 힘일 것이다.” 한씨를 지켜본 LA한미연합회 간사 그레이스 유의 말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