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정윤희] 감사할 일, 반성할 일
입력 2010-12-30 17:45
기척도 없이 밤새 눈이 내렸다. 눈은 언제나 조용히 차곡차곡 쌓인다. 우리 아파트 마당에는 동백나무가 많다. 붉게 물든 동백꽃은 언제 졌는지 초록색 잎사귀마다 켜켜이 쌓인 눈이 햇살을 받아 하얀 꽃망울들이 활짝 펴 흔들거린다.
세밑에 내린 눈 때문에 발걸음이 더디지만, 그 덕분에 잎사귀마다 내려앉은 눈송이를 가만가만 바라볼 수 있었다. 아, 뭐가 그리 바쁘다고 동백꽃이 피고 지는 줄 모르며 살았던가. 나는 변명거리라도 찾는 듯 동백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억지로 끄집어내려고 애썼다. 마땅히 변명도 못하고 새침하게 찬바람만 일렁이며 동백나무를 뒤로 하고 걷는다.
와인 페스티벌에서 상을 탄 소믈리에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어떤 와인이 좋은 와인이냐고. 그 소믈리에는 당신이 들고 있는 잔 속의 와인이 가장 좋은 와인이라고 답해주었다. 세밑에 다다르면 언제나 후회스러운 일들이 밀려온다. 감사하며 살 이유들이 많건만 언제나 부족하다고 퉁퉁거리며 살아 온 지난 삶들이 더 후회스럽게 만든다.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마침 출간된 ‘반성’이라는 책을 읽었다. 김용택 박완서 이순원 이재무 이승우 구효서 안도현 등 스무 명의 문인이 반성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 이야기를 묶은 책인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장면들을 읽으면서 사람은 상처와 치유를 거듭 반복하며 살아가는 존재인가 싶다.
자신이 살아온 길마다 어머니의 이슬털이가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소설가 이순원, 뇌졸중으로 요양원에 계신 엄마의 하루 일과 전부가 아침 10시 딸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음을 엄마가 쓰러지신 후에나 알게 되었다는 서석화, 오랫동안 아버지와 불화한 것에 대해 반성한다는 시인 장석주, 남은 음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변화하는 세상에서 버리지 못한 자신의 신념을 탓하는 소설가 박완서, 집착과 울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반성한다는 시인 이재무, 하찮은 풀잎 앞에서 겸손을 배운다는 시인 안도현 등 문인들이 반성하는 내용은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장석주 시인은 책에서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되려면 반성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진짜 반성은 반성하지 않는 삶으로 제 삶을 혁신하고 개조하는 것이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 반성이란 헛된 짓이라는 주장이다. “나는 늘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자주 반성하고, 그걸 실천에 옮겨라! 그래서 나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앞에서도 반성하고, 가을 어느 날 바람이 없는데 혼자 가지에 매달린 낙엽 한 장 앞에서도 반성하고, 뜰에 있는 대추나무 가지에 달려 저 혼자 붉고 둥글게 잘 익은 대추 한 알을 바라보면서도 반성한다.”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전 나도 노트에 반성할 것들을 적어 보기로 했다. 감사해야 할 것도 함께 적어 보련다. 아, 그동안 잊고 살았던 삶의 편린들. 모두 소중하고 감사할 일들이다.
정윤희 출판저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