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샤베트 VS 달샤벳, 다른 이름 같나요?… 그림책 작가가 걸그룹과 다투는 사연
입력 2010-12-30 18:12
그림책 작가 백희나(39)씨가 인터넷에서 ‘달샤벳’이란 이름을 발견한 건 지난 12일이었다. 8월 초 그림책 ‘달샤베트’(스토리보울)를 낸 뒤 그녀의 아침 일과는 검색엔진의 초록 네모 안에 달샤베트란 네 글자를 치는 일이었다.
서점가에서 달샤베트는 제법 스타였다. 출간 4개월 만에 4쇄 2만8000부가 동났고, 5쇄 1만부도 찍자마자 빠르게 팔려나갔다. 출판 칼럼니스트 한미화씨의 말처럼 “초판 3000부 소화가 어려운, 그림책이라는 마이너 시장에서 거둔 놀라운 성과”였다. 달샤베트는 두 달 앞서 차린 1인 출판사 스토리보울의 첫 작품. 아침마다 인터넷으로 확인하는 독자의 한마디는 굉장한 응원이 됐다.
그날 그녀가 찾은 건 칭찬도, 비판도 아니었다. 새하얀 미니스커트를 입은 소녀 6명. 신인 걸그룹 달샤벳이었다.
달샤베트 vs 달샤벳
달샤베트가 출간된 뒤 한 연예기획사에서 백씨에게 연락을 해왔다. 제목 느낌이 좋다며 신인 걸그룹 이름으로 쓰고 싶다고 했다. 백씨 대답은 “절대 싫다”였다.
“(그룹이 유명해지면) 내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그래요. 그럴 수도 있어요. 저는 이름 없는 그림책 작가이고 상대는 연예인이니까 인지도로는 경쟁할 수 없겠죠. 하지만 전 처음부터 확고했어요. 달샤베트는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으로, 순수한 문화로, 무공해 이미지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며칠 후 데뷔하는 달샤벳은 섹시할 수도, 귀여울 수도 있다. 정말 뛰어난 가수로 성장할 수도, 이미 가요계에 차고 넘치는 걸그룹 광팬들의 타깃이 될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백씨는 “관계없다”고 했다. “결과가 뭐든, 그로 인해 받게 될 영향이 좋든 나쁘든 다 싫었어요. 제게 중요한 건 책 달샤베트예요. 책 말고 다른 무엇이 되는 것도 원치 않았어요.”
달샤베트가 달샤벳으로 변신했다는 걸 알게 된 날, 백씨는 항의전화를 걸었다. 기획사는 달샤벳(Dalshabet)이 ‘달콤한 샤벳’의 준말로 ‘달로 만든 셔벗(sherbet)’를 뜻하는 달샤베트와 완전히 다른 단어라고 했다. 일단 글자 수와 영어 알파벳은 달랐다.
백씨는 절반쯤 분개하고, 절반쯤 곤혹스러워졌다. “(기획사는) 이미 투자를 많이 했다고 그래요. 방송 스케줄도 잡혔고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없다고. (그룹이) 망하길 내가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답답했어요. 그깟 이름 좀 쓰면 어때, 별거 아닌데 참으면 되지, 쉽게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책에도 생명이 있어요. 한 생명이 매장될 수도 있는데 참을 수 없고, 참아선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백씨 말처럼 관전자들에게는 ‘까짓 단어 하나쯤’의 문제일 수 있다. 글 72줄, 총 32쪽짜리 얇디얇은 그림책 한 권. 하지만 백씨에게 달샤베트는 꼬박 1년의 제작기간이 걸린 백희나 감독, 주연, 제작의 ‘1인 블록버스터’였다. 그걸 알아야 그녀가 가진 절반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무더위에 녹아내린 달을 얼려 먹은 달샤베트 이야기는 실제로 ‘너무너무 더워서 잠도 오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어느 여름밤 떠올렸다. 아이디어가 기승전결의 스토리가 되기까지 숙성기간만 3년. 그리고도 그녀의 지난 1년은 달샤베트를 위해 글 쓰고, 그림 그리고, 배경 만들고, 사진 찍는 데 투자됐다. 백씨는 그림과 모형을 사진 찍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책이 나와도 일이 끝나는 건 아니다. 백씨는 편집자 영업사원 경리 사장 역할까지 해내야 한다.
“아이를 위한 책이고 창작물이고 문화잖아요. 더군다나 창작 그림책이라는 게 이제 막 만들어져 가는 문화인 거고. 그걸 그냥 그대로 지켜줄 수는 없는 건지. 그러면 안 되는 건지.”
달샤베트를 놓고 논쟁이 오가던 지난 11월 5일 백씨는 공연 영화 애니메이션 등 분야에서 달샤베트에 대한 특허권 등록을 출원했다. 5일 후 달샤벳도 뒤따랐다. 그 후 한 달간의 대화로도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으니, 이제 상황은 법이 정리하게 됐다. 달샤베트와 달샤벳 중 누가 생존하게 될지. 결론은 내년 가을쯤 내려질 전망이다.
구름빵을 ‘입양’보낸 사연
지난 16일 인터넷에서는 ‘구름빵 작가 백희나님의 달샤베트를 지켜주세요’라는 제목의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어느 네티즌이 ‘피땀 흘린 작품이 섹시 걸그룹에 밀리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라며 백 작가를 돕자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글 가운데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구름빵이 원작자에게 저작권료 한 푼 안 돌아가는 히트작인 것도 아시죠?’
사정은 이랬다. 백씨의 데뷔작인 ‘구름빵’은 출간 7년 만에 40만부가 팔려나갔다. 창작 그림책이 전집 아닌 낱권으로 이룬 판매고로는 놀라웠다. 전문가 평도 좋았다. 2005년 볼로냐 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됐고, 이후 프랑스 독일 대만 일본 중국에 줄줄이 수출됐다. 인기를 업고 2차 상품도 속속 만들어졌다. 현재 KBS TV에서 78부작 애니메이션 구름빵이 방영 중이고, 구름빵 뮤지컬과 콘서트도 무대에 올랐다. 모 식품회사는 책 속 캐릭터를 본뜬 구름빵을 만들어 팔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성공은 원작자 백씨 수입과 무관했다. 애초 한정된 부수의 시리즈 그림책으로 계약돼 인세가 아니라 원고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2차 저작권을 출판사에 넘기는 양도 계약까지 해 향후 어떤 추가 상품이 만들어져도 백씨에게는 저작권료가 배분되지 않는다.
백씨는 구름빵 얘기를 부담스러워했다. “오래 전 일이에요. 쓴 약이었는데 다행히도 잘 삼켜 소화시켰어요. 성장통을 심하게 앓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많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니까요.”
그는 구름빵을 “재벌가에 입양 간 자식”에 비유했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잘 커주었으면 좋겠어요. 잘 키워줘서 고맙기도 하고요. 물론 제 의지와 상관없이 여기저기 각색되어 나타나는 걸 지켜보는 것은 굉장히 괴롭지만요. 사실 독자들은 돈이니, 계약이니 그런 거 몰랐으면 해요. 그건 우리끼리, 만드는 사람끼리 얘기잖아요. 독자는 그냥 좋은 책으로 기억하면 좋겠어요.”
잘 소화했다고는 해도 구름빵 이후 백씨는 한동안 일을 쉬었다. 달샤베트는 일종의 재기작인데, 연이은 논란에 연타를 맞은 꼴이 됐다. 하지만 뒤집어보자면 구름빵에서 달샤베트로 이어지는 논란은 그림책답지 않은 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판매량이 증명하듯, 국내 아동출판계에서 백희나라는 이름은 독보적인 자리에 서 있다. 구름빵 달샤베트의 독자는 자녀를 위해 책을 사는 부모 소비자만이 아니다. 인터넷 서점 리뷰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다. ‘처음 그림책 사봤다. 부끄럽지만 지하철에서 꺼내 읽었다. 어른인 내가.’ 그녀에게는 “1세대 그림책 작가와 달리 과거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상상력”(한미화씨)이 돋보였다. 바로 그 상상력은 만화와 일러스트를 즐기는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고 있다.
“잠깐 쉴 때 알았는데 저는 작업 안 하고는 못 살겠더라고요. 그림책 없이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요. 죽을 것 같았어요. 그림책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시작한 일이고요. 안전하고 순수하고 예쁜 세상에 머물고 싶다, 그런 아이들의 세계에서 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그림책을 만들어요. 그걸 지키고 싶을 뿐이에요.” 달샤베트가 오직 책이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이유였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