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수지 (5) 여순반란사건 계기 간호사 되기로 결심
입력 2010-12-30 17:36
나는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48년 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났다. 반란의 주동자들은 주민들을 초등학교 교실에 50∼60명씩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경찰이나 교사, 목사, 공공기관에서 일한 사람은 모두 불러내 운동장에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했다. 사흘째 되던 날에도 이들에게 이름이 불린 사람들이 운동장에 줄줄이 세워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교실에서 유리창을 통해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봤다. 키가 작은 나도 어른들 틈에 끼어 까치발을 한 채 밖을 내다봤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총부리가 일제히 사람들을 향해 겨눠졌고, 총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그런데 내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총을 맞지 않은 것 같았다.
“엄마, 저 아저씨 총을 안 맞은 것 같아.”
어머니는 얼른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총소리가 그치면 다른 사람들이 와서 완전히 죽었는지를 칼로 확인하곤 했는데 그날은 총만 쏘고 그냥 가버렸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나는 계속해서 그 사람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한참이 지난 뒤 그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님, 저 아저씨를 살려주세요.”
완전히 어두워지자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피를 흘리면서 우리가 있는 교실로 들어왔다. 그를 놓고 사람들이 두 패로 갈라져 언쟁했다. 한 노인이 성을 내며 외쳤다.
“저놈을 당장 내보내라! 저놈 때문에 우리까지 죽는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반대하며 막아섰다.
“안됩니다. 이분을 숨겨 줍시다.”
그때 한 젊은 부인이 앞으로 나가더니 쓰러진 그를 부축해 가운데에 눕혔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두 줄로 둘러세워 그를 가리게 했다. 그 여인은 아기를 업고 있던 아주머니의 띠를 풀어 그것으로 지혈을 시켰다. 얼마 후 피가 멈췄다.
“누가 물 좀 떠다 주세요.”
그러나 아무도 선뜻 밖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얼른 나가서 양동이에 물을 떠가지고 왔다.
밤새도록 헛소리를 하는 남자 옆에서 부인은 “정신 차리라”며 뺨을 툭툭 치고, 찬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등 정성스럽게 간호했다. 나도 잠을 자지 않고 꼬박 그 부인과 남자를 지켜봤다. 새벽녘에 남자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여기가 어디요?”
신기하고 놀라웠다. 어린 내 눈에는 죽어가는 사람을 밤새도록 간호해서 살려놨다는 게 엄청난 사건이었다. 나는 부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줌마 뭐 하는 사람이에요?” “응, 간호사란다.”
그 순간 결심했다. “아, 나도 간호사가 돼야지.”
간호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힌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처음으로 운동회가 열렸다. 운동회 마지막 순서로 가장행렬이 예정됐는데, 담임선생님이 “김수지, 넌 간호사야”하며 간호사 역할을 맡겼다. 나는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내가 간호사가 되고 싶은 것을 선생님이 어떻게 아셨을까?’
감사하고 신이 났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가장행렬에 필요한 간호사 복장이 없었다. 난감했다. 여수 의원에 가서 머리에 쓰는 캡을 빌려왔지만 흰 원피스가 걱정이었다. 엄마에게 옷을 해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고민하다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흰 원피스, 흰 신발, 흰 스타킹이 있어야 해요.”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